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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5 격주간 제68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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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 한국사 이야기> 사람을 죽여 귀양을 간 코끼리 |
지금은 동물원에 가야 코끼리를 볼 수 있는데, 조선시대에 코끼리를 기른 적이 있었다. 1411년, 일본에서 사신이 와서 태종에게 코끼리 한 마리를 바쳤던 것이다.
태종은 코끼리를 사복시(궁궐의 말과 소, 수레 등을 관리하는 관청)에서 맡아 기르도록 했다. 코끼리는 낯선 동물이어서 어떻게 길러야 할지 몰랐다. 그저 하루에 콩을 4, 5말씩 먹이며 정성을 다해 돌봤다.
그러던 어느 날, 사복시에 코끼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정3품인 공조전서를 지냈던 이우가 찾아왔다. 이우는 코끼리에게 다가가 놀리듯이 말했다.
“네놈이 왜국에서 왔다는 코끼리로구나. 그 녀석 참 추하게 생겼네. 에이, 재수 없어. 퉤!”
그러자 화가 치밀어 오른 코끼리는 이우를 쓰러뜨리고 큰 발로 밟아 버렸다. 결국 이우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1413년(태종 13년), 조정에서 회의가 열렸다. ‘코끼리 재판’이 열린 것이다. 병조판서 유정현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본에서 바친 코끼리는 전하께서 아끼시는 동물도 아니고, 나라에 이익도 없습니다. 코끼리가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는데, 법대로 처리한다면 그 죄를 물어 코끼리를 죽여야 합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바친 코끼리이니 죽일 수는 없고, 전라도의 외딴 섬에 보냈으면 합니다. 사복시에서도 일 년에 먹이는 콩이 거의 수백 석에 이르러 기르기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태종은 유정현의 말을 그대로 따라, 코끼리를 순천의 장도라는 섬으로 귀양을 보냈다.
귀양 간 코끼리는 물과 풀밖에 먹지 못해 날이 갈수록 야위어가더니, 사람만 보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에게 이런 보고를 받은 태종은 코끼리가 불쌍해서 육지로 보내 기르라고 명했다.
전라도 관찰사는 네 고을의 수령에게 돌아가며 코끼리를 기르도록 했다. 하지만 6년 동안 그 일을 하다 보니 백성들의 고생의 날로 가중됐다. 1420년(세종 2년), 전라도 관찰사는 상왕 태종에게 보고를 올려 “충청도, 경상도까지 돌아가며 코끼리를 기르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청했고, 태종은 그 청을 받아들여 코끼리를 충청도 공주로 보냈다.
하지만 1421년 3월 코끼리는 또 사고를 치고 말았다. 자기를 돌보는 노비를 발로 차 죽인 것이다. 충청도 관찰사는 이 사실을 알리며 이렇게 건의했다.
“코끼리는 애물단지입니다. 이 짐승을 길러 나라에 이익이 없습니다. 먹성은 또 얼마나 좋은지 다른 짐승보다 먹이가 열갑절이나 더 듭니다. 성질이 사나워서 성이 나면 사람을 해치니, 코끼리를 섬에 있는 목장으로 보내십시오.”
세종은 충청도 관찰사의 보고를 받고 이렇게 지시했다.
“물과 풀이 좋은 섬을 골라 코끼리를 그 곳으로 보내라. 코끼리를 결코 병들어 죽게 해서는 안 된다.”
코끼리는 또다시 귀양을 갔는데,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어쨌든 코끼리 한 마리 때문에 온 나라가 야단법석을 떨었으니 우습기만 하다.
〈신현배 / 시인, 아동문학가〉
♠“코끼리는 순한 동물로 알려져 있는데,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었죠?”
동물원 수의사에 따르면, 모든 동물 가운데 코끼리 사육이 가장 힘들다고 한다. 코끼리는 거대한 몸집만큼 접근하기 어려운 동물이어서, 동물원에서는 다 자란 큰 코끼리는 들이지 않고 4살 아래의 어린 코끼리를 들이고 있다. 사육사 한 사람이 코끼리를 어려서부터 길들이고 훈련시키는데, 코끼리가 죽을 때까지 평생을 같이 지낸다는 것이다.
동물 가운데 가장 다루기 힘들고 위험한 동물이 발정기에 있는 수컷 코끼리이다. 코끼리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암컷보다 수컷이 발정을 일으킨다. 그런데 이 때는 순한 코끼리도 어찌나 사나워지는지, 함부로 접근했다가는 큰일을 당하게 된다. 아마도 귀양을 간 코끼리는 수컷 코끼리여서, 사람들이 발정기 때 멋모르고 접근했다가 공격을 받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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