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9-01 격주간 제683호>
<별난 한국사 이야기> 노처녀는 관가에서 시집을 보내 주다

1502년(연산군 8년) 5월 10일, 연산군은 조선 팔도 관찰사에게 이런 지시를 내렸다.
“양반의 딸 가운데 서른이 되도록 가난하여 시집을 못 간 처녀가 있으면, 나라에서 혼수 비용을 주어 시집을 보내고, 집안 형편이 어렵지 않은데도 서른이 되도록 딸을 시집보내지 않은 집이 있으면 그 가장을 잡아들여 엄벌에 처하라.”

경국대전에서도 명시

“우리나라의 법전(경국대전)에는 ‘고조’라고 하여, 양반의 딸이 혼인비용이 없어 서른이 되도록 시집을 못 가고 있으면 나라에서 혼인 비용을 마련해 주도록 되어 있다. 각 관찰사는 가난 때문에 시집 못 간 처녀가 있는지 조사하여, 혼기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조치를 취하라. 내가 이런 명령을 내리는 것은 요즘 노처녀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방탕한 생활을 한 폭군 연산군이 팔도 관찰사에게 이런 지시를 내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어느 왕이든 노처녀를 시집보내 주라는 명령을 자주 내렸으니 놀랄 것 없다.

옛날에도 합동결혼식 올려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은 1491년, 가난하여 시집 못 간 처녀를 찾아내 관가에서 혼인비용을 대주라고 명령하면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혼인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나라를 다스리는 왕은 나라 안에 제때 시집을 못 가 원한을 품은 여인이나 허송세월을 보내는 독신 남성이 없게 해야 한다. 옛 왕들은 이런 일을 중히 여겨,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에 청춘남녀를 한자리에 불러 모아 혼인을 시켰다. 이렇게 해야 자연이나 사람이나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재앙도 없고 나라도 평안해지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는 ‘주자가례’에 따라 남자는 16~30세, 여자는 14~20세에 혼인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여자는 20세가 넘으면 노처녀 취급을 했다.
나라에서 혼인 비용을 주는 대상은 반드시 양반의 딸이고, 부모를 모두 여의었거나 생계가 무척 어려워야 했다. 그리하여 대상이 정해지면 서울은 한성부에서, 지방은 각 관찰사가 관가를 통해 곡식을 혼인 비용으로 내주게 했다.

20세 넘으면 노처녀

각 도의 관찰사나 지방 수령들은 자기 지역에 서른이 되도록 시집을 못 간 처녀가 생기지 않도록 무진 애를 썼다. 만약에 노처녀가 여러 명 있으면 인사 고과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고, 세 번 그런 점수를 받으면 좌천되거나 파면을 당했으니 말이다.
 〈신현배 / 시인, 아동문학가〉

♠ 관가 덕으로 시집을 가는 노처녀를 무엇이라고 불렀나?

지방 수령은 자기 고을에 노처녀가 있으면 우선 관가로 불렀다.
그리고는 집안 형편이 어떤지 알아보고, 벼슬한 친척이 있느냐고 물었다. 벼슬한 친척이 있다고 하면 아무리 먼 친척이라도 그를 불러 혼인 비용을 내놓게 했다.
이것은 나라의 명령이기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벼슬한 친척이 없다고 하면 지방 수령은 노처녀의 혼인 비용으로 관가의 곡식을 내주었다.
노처녀들은 이렇듯 모두 시집을 가게 되는데, 관가 덕으로 시집을 갔다고 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관가떡’이라고 불리었다.
조선 시대에는 고을에 가뭄이 들어도, 시집 못 간 처녀가 죽어서 귀신이 되어 지방 수령에게 해코지를 한다고 믿었단다.
그런 처녀가 없으면 고을에 노처녀가 있어, 시집 못 간 원한이 하늘에 닿아 가뭄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방 수령은 가뭄을 해소하려고 서둘러 노처녀를 찾아내 시집을 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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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익 "양반의 딸...엄벌에 처하라"고 연산군이 조선 팔도 관찰사에게 지시를 내린 날은 '영산군일기'에 따르면 5월 10일이 아니라 5월 11일인데, 어느 날이 맞나요? [2008-09-08 오후 1:4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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