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15 격주간 제682호>
<별난 한국사 이야기> 신라에서는 남자도 귀걸이를 하고 화장을 했다?

1997년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남자 가수가 귀걸이를 한 채 방송에 출연하려고 했다. 그러자 방송국에서는 귀걸이를 빼지 않으면 방송에 출연할 수 없다고 했다. 남자 가수가 방송국의 요구를 거절해 결국 방송에 출연하지 못했는데, 만약에 그가 옛날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정답은 ‘딩동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까지만 해도 남자는 귀걸이를 하는 풍습이 있었으니까.

임진왜란 때까지 귀걸이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런 일이 있었단다. 전쟁에 참전한 명나라 군인들은 일본군 병사들의 목을 베었다며, 엉뚱하게도 조선 사람의 머리를 잘라 바쳐 상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는 일본군인지 조선 사람인지 가려내기 위해 귀를 뚫고 귀걸이를 했는지 살펴보았단다. 조선 사람들은 모두 귀걸이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남자들이 귀걸이를 하기 시작했을까? 그 역사를 알려면 삼국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낙랑 땅에서는 한때 귀걸이가 유행했다고 한다. 그 중국산 귀걸이는 고구려에 전해졌고, 신라에까지 널리 퍼져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귀걸이를 하게 된 거다.
신라 고분에서 발굴된 귀걸이를 보면, 당시에 남자들도 귀걸이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귀걸이는 굵기에 따라 태환과 세환으로 나뉘는데, 경주 부부총에서 발굴되어 국보 제90호로 지정된 ‘금제 태환 귀걸이’ 등 여러 점의 남자 귀걸이를 찾아볼 수 있다.
신라 시대에 화려한 귀걸이를 하고 얼굴에 화장까지 한 것은 화랑으로 뽑힌 젊은 남자들이다. 신라에서는 낭도 수천 명을 거느린 화랑을 뽑아 인재들을 양성했는데, 당나라 스님이 쓴 ‘신라 국기’라는 책에는 화랑에 대해 이렇게 씌어 있다.
“귀족 출신 자제 중에 얼굴이 잘생긴 사람을 뽑아 얼굴에 분을 바르고 연지를 발라 화랑으로 받드니, 많은 무리가 그를 따르고 받들어 섬긴다.”

우두머리로 권위상징

화랑은 화장을 하고 귀걸이를 다는 등 곱게 단장을 했다는 거다. 그것은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두머리로서 권력과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귀걸이와 화장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과시하는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신현배 / 시인, 아동문학가〉

♠ 우리나라 남자들은
언제부터 귀걸이를 하지 못하게 되었나?

우리나라에서는 남자 여자 모두 어릴 적에 귀를 뚫고 귀걸이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삼국 시대 때부터 시작된 이 풍습은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선조 때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데 1572년(선조 5년) 9월 22일, 선조는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렸다.
“신체발부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초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크고 작은 사내아이들이 귀를 뚫고 귀걸이를 달아 중국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앞으로는 이와 같은 오랑캐의 풍습을 일체 고치도록 널리 알려라. 서울은 이 달을 기한으로 하되, 만약에 꺼리어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엄한 벌을 주도록 하라.”
선조는 남자가 귀걸이 하는 것은 오랑캐의 풍습이라며 그것을 금지하라고 명을 내린 것이다. 이 때부터 남자들은 귀걸이를 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 풍습은 금방 사라지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다가, 단속을 심하게 했는지 그 뒤부터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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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익 조선왕조실록을 다시 뒤져보니, 귀걸이 풍조를 금하는 선조의 전교는 선조5년 9월 22일이 아니라 9월 28일이었습니다. [2008-09-08 오후 1:51:39]
이재익 선조실록 1572년(선조 5년) 9월22일 기사에는 "신체발부... 벌을 주도록 하라."는 전교가 없는데, 출처가 어디인가요? [2008-08-29 오전 11: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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