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01 격주간 제681호>
<우리의 지명이 탄생하기까지…> 천등산 박달재

사랑과 이별의 고개

<박달과 금봉의 로맨스가 만들어낸 천둥산 박달재 모습.>
옛날 경상도 어느 곳에 사는 ‘박달’이란 선비가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게 되었다. 박달은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몇 날 며칠을 걸어 충청도 제천 땅 천등산에 닿았다. 천등산에는 높고 험한 고개가 있었다. 박달은 30리나 되는 천등산의 높고 험한 고갯길을 넘었다. 날이 저물 즈음 평동 마을에 도착한 박달은 마을에서 묵을 생각으로 마을을 둘러보았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집이 눈에 띈 박달은 그 집으로 가서 주인을 불러 하룻밤 묵어가게 되었다. 주인은 박달을 집 안으로 들여 사랑방을 내주었다. 방 안에는 책이 잔뜩 쌓여 있었다.
‘이 집 주인이 공부를 많이 한 선비인가 봐. 내가 봐도 어려운 책이 상당수 있는걸.’
박달은 책을 한 권 한 권 살펴보며 속으로 놀랐다.
잠시 뒤 저녁상이 들어왔다. 상을 갖고 온 것은 주인의 딸인 금봉이였다. 박달은 금봉이를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금봉이가 선녀처럼 아름다웠던 것이다. 박달이 물었다.
“주인 어른께서는 어떤 일을 하시는 분입니까?”
“저의 아버지는 선비이십니다. 서울에서 벼슬을 하다가 이 곳으로 귀양을 오셨어요.”
박달은 상을 물린 뒤에도 금봉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박달은 이튿날 서울로 출발하지 않고 금봉이 집에서 사흘을 묵었다.
금봉이가 말했다.
“도련님, 이제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셔야지요.”
“알겠소. 과거에 급제하여 돌아오리다. 그 때까지 나를 기다려 주시오. 몸조심하고…….”
“제 걱정은 마시고 잘 다녀오십시오. 과거에 급제해 돌아오시기를 산신령님께 빌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박달은 서울로 올라가 과거를 치렀다. 그러나 결과는 낙방이었다. 금봉이 생각만 하다가 시험을 망쳤던 것이다.
‘아, 과거에 급제해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금봉 아씨를 대할 면목이 없구나.’
박달은 길바닥에 주저앉아 탄식했다.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는 금봉 아씨에게 돌아가지 말자. 이곳에 남아 열심히 공부하는 거야.’
박달은 이렇게 결심하고는 서울에 남아 글공부에 매달렸다. 박달은 3년 뒤에 치러진 과거에 응시하여 당당히 장원 급제를 했다. 박달은 떳떳하게 금봉이를 만나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박달은 제천 땅으로 한 걸음에 달려갔다. 평동 금봉이 집이 저만치 보였다.
그런데 금봉이 집에서 한 초라한 상여가 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금봉 아씨 아버지가 돌아가셨나?’
박달은 상여 뒤를 따르는 금봉이 아버지를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 그럼 금봉 아씨가?’
금봉이는 박달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러나 3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아무 소식이 없자 상사병이 났다. 그래서 박달 이름을 부르며 며칠 동안 심하게 앓다가, 사흘 전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금봉 아씨!”
박달은 상여를 붙잡고 통곡했다. 금봉이 아버지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상여가 떠나간 뒤 고갯마루 쪽을 바라보았다. 그 때 박달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금봉이가 춤을 추며 고개를 올라가는 것이었다.
“금봉 아씨!”
박달은 고개 쪽으로 달려갔다. 금봉이 저만치 서 있었다. 이리 가까이 오라고 생글생글 웃으며 두 팔을 벌린 채….
“금봉 아씨!”
박달은 금봉이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금봉이를 힘껏 껴안았다.
바로 그 순간, 박달은 비명을 지르며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박달은 금봉이의 환상을 보고 허공으로 몸을 날렸던 것이다.
박달이 죽은 뒤부터 충북 제천시 봉양읍 천등산 고개는 ‘박달재’라고 불리게 되었다.
〈신현배 / 시인,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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