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병 규 (소년한국일보편집부국장)
얼마 전에 어느 여류 동화작가와 이야기를 하다가 요즘 작품 발표가 뜸한 이유를 물었는데, 그 대답이 내 머리카락을 쭈뼛하게 했다.
“아이 사육하느라 바빠서요.” 이 말을 하는 그녀의 표정에서 은연중에 자랑이 묻어나는 것도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사육이라니? 글을 쓰는 분이 어떻게 그런 말을….” “호호, 요즘 젊은 엄마들이 즐겨 쓰는 말인데요, 뭘.”
사육이란 짐승 따위를 먹여 기름을 이른다. 그런데 아들딸을 ‘사육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자녀 교육 뒷바라지를 나타내는 은어쯤 되는 모양이다.
요즘 젊은 어머니들이 초등학교 아이를 명문 대학생으로 기르기 위해 목을 매달고 있다고 했다. 그 첫 단계로 특수 중학교나 특정 지역의 중학교에 가야하고, 다음에는 과학고나 외국어고, 또는 이름 있는 예술고에 가야한다. 이 과정에서 조금만 삐끗해도 아이의 장래에 먹구름이 드리워진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오감을 열어놓고 좋은 학원, 소문난 강사, 족집게 논술, 영어 과외 도사, 외국 유학 정보를 탐문하며 다닌다고 했다. 이렇게 얻은 정보에 따라 아이를 이 학원, 저 강사한테로 끌고 다니는 실정이란다. 이것이 마치 소나 양을 풀 뜯기러 다니는 꼴과 닮았다고 해서 처음에 자학적으로 사육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는데, 어느 사이에 자랑으로 입에 달고 다니는 어머니들이 늘어났다는 설명이었다.
이런 어머니도 딱하지만, 이렇게 끌려 다니는 아이들은 정말 죽을 맛일 터이다. 어머니는 생색내고 잠시 우월감이라도 느끼겠지만 이렇게 경쟁에 내몰려 인생의 실뿌리가 채 말라가고 있는 아이들은 얼마나 가슴 아프고 억울하겠는가.
비극은 극성을 아무리 떨어도 어머니의 뜻대로 사육되지도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런데 온 나라가 이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현실은 우리를 정말 슬프게 한다.
바른 교육이란 부모가 바라는 무엇으로 길러지는 게 아니라 그 아이가 바라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야 건강한 어린이, 건강한 국민이 많아지고 따라서 나라도 건강해질 테니까. 이런 건강의 시원은 자연이다.
나는 내 아이에게/ 나무를 껴안고 동물과 대화하는 법을/ 먼저 가르치리라./ 숫자 계산이나 맞춤법보다는/ 첫 목련의 기쁨과 나비의 이름들을/ 먼저 가르치리라.
나는 내 아이에게/ 성경이나 불경보다는/ 자연의 책에서 더 많이 배우게 하리라./ 지식에 기대기 전에/ 맨발로 흙을 딛고 서는 법을 알게 하리라.
아, 나는 인위적인 세상에서 배운 어떤 것도/ 내 아이에게 가르치지 않으리라./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를 내 아이가 아닌/ 더 큰 자연의 아이라 생각하리라.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유명한 ‘뉴에이지 저널’의 편집장을 지낸 조안 던컨 올리버의 작품이다. 이 시인에게 “정말이지 아이들을 사육해도 되는가?”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정말 아이를 사육하고 싶으면, 서툰 사람이 하지 말고 자연이 사육하게 맡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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