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0-01 격주간 제661호>
<이야기 한자성어> 懲羹吹薺(징갱취제)

“뜨거운 국에 입을 데어 냉채까지 불어 먹는다는 말로, 한번 실패한 일로 모든 일에 지나치게 조심함을 비유하는 말”

전국시대 말, 진(秦)나라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오직 초(楚)와 제(齊) 두 나라 뿐이었다. 그래서 진나라의 재상 장의(張儀)는 초제동맹의 주된 역할을 했고, 동맹을 강화(强化)하려는 초나라의 삼려대부(三閭大夫) 굴원(屈原)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중, 초나라 회왕(懷王)의 총희(寵姬) 정수(鄭袖)와 간신 근상 등이 굴원을 미워한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장의는 그들을 매수하여 굴원 제거 공작을 폈다.
마침내 굴원이 축출되자, 장의는 회왕에게 제나라와 단교하는 조건으로 진나라의 땅 600리를 할양할 것을 제의하였다. 회왕이 기뻐하며 제나라와 단교하였으나, 장의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속은 것을 안 회왕이 진나라로 쳐들어갔지만 도리어 대패하고 진과의 접경 지역마저 빼앗겼다. 그러자 얼마 후 회왕은 굴원을 다시 등용하였다.
10년 후, 진나라로부터 우호증진이라는 미명 아래 회왕을 초대하는 사신이 왔다. 굴원이 진나라는 믿을 수 없으니 이 초청을 응해서는 안 될 것이라 하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회왕은 왕자 자란(子蘭)의 말에 따라 진나라로 갔다가 포로가 되어 이듬해 객사하였다. 초나라는 태자가 왕위에 오르고 자란이 재상이 되었다. 굴원이 회왕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자란에게 물었으나, 도리어 추방당하였다.
그 후 굴원은 10여 년을 오직 불타는 조국애를 가슴에 안은 채, 마음의 울분을 어쩌지 못하고 둥팅호(洞庭湖) 주변을 방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울분의 도가 지나쳐 이를 억제하지 못하고 멱라(汨羅)강에 몸을 던졌다. 이후 사람들은 굴원의 넋을 ‘멱라의 귀신[汨羅之鬼]’이라 하였다.
‘초사(楚辭)’에 있는 굴원의 작품 대부분은 이때에 씌어진 것이다. 그는 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걱정하였으며, 나라를 그르치는 간신을 미워하고 자신의 고고한 심정을 열화같이 노래하였다. 징갱취제는 ‘초사’에 실려 있는 굴원의 작품 중 ‘구장(九章)’의 ‘석송(惜誦 : 안타까운 마음을 노래함)’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뜨거운 국에 데어서 냉채까지 불면서(懲於羹者而吹薺兮), 어찌하여 그 뜻을 바꾸지 못하는가(何不變此志之也).”
굴원은 석송을 통해, 자기보다 더 군주를 생각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선비가 없음을 슬퍼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이 뭇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것에 대해 분노하였으며, 이로 인한 고독을 한탄하면서도 자신의 절조만은 변하지 않겠다는 강개지심(慷慨之心)을 토로하였다. 징갱취제와 유사한 말로 징선기여(懲船忌輿), 오우천월(吳牛喘月)이 있다.
〈징계할 징(懲)/국 갱(羹)/불 취(吹)/냉채 제(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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