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풀어보는 한자성어
한나라 무제 때 5000명의 보병을 이끌고 흉노를 정벌하러 나갔던 이릉 장군은 열 배가 넘는 적의 기병을 맞아 처음 10여 일간은 잘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듬해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치열한 전투 중에 전사한 줄 알았던 이릉이 흉노에게 투항하여 후대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안 무제는 크게 노하여 이릉 일가를 참형에 처하라고 엄명했다. 그러나 중신을 비롯한 이릉의 동료들은 침묵 속에 무제의 안색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이릉을 위해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를 분개한 사마천이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사마천은 지난날 흉노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던 이광 장군의 손자인 이릉을 평소부터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국난에 임할 용장’이라고 굳게 믿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가로서의 냉철한 눈으로 사태의 진상을 통찰하고 대담하게 무제에게 아뢰었다.
“황공하오나 이릉은 소수의 보병으로 오랑캐의 수만 기병과 싸워 그 괴수를 경악케 하였으나 원군은 오지 않고 아군 속에 배반자까지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패전한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하오나 끝까지 병졸들과 어려움을 같이한 이릉은 인간으로서 극한의 역량을 발휘한 명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옵니다.
그가 흉노에게 투항한 것도 필시 훗날 황은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한 고육책으로 사료되오니, 차제에 폐하께서 이릉의 무공을 천하에 공표하시오소서.”
무제는 진노하여 사마천을 투옥한 후 궁형(宮刑)에 처했다. 이 사건을 가리켜 ‘이릉의 화(李陵之禍)’라고 한다. 궁형이란 남성의 생식기를 잘라 없애는 것으로 가장 수치스런 형벌이었다. 사마천은 이를 친구인 임안에게 알리는 글 ‘보임안서(報任安書)’에서 착잡한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법에 따라 사형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 마리의 소 중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을 뿐이니 나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나? 그리고 세상 사람들 또한 내가 죽는다고 해도 절개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나쁜 말하다가 큰 죄를 지어서 어리석게 죽었다고 여길 것이네.”
사마천이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살아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사마천은 태사령(太史令)으로 봉직했던 아버지 사마담이 임종시에 통사(通史)를 기록하라고 한 유언에 따라 ‘사기(事記)’를 집필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기’를 완성하기 전에는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중국 최초의 사서(史書)로서 불후의 명저로 꼽히는 ‘사기’ 130여권이 완성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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