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8-15 격주간 제658호>
<4-H교사 이야기> 4-H회원 지도와 나의 삶

<백 수 근>

1989년 성일여자고등학교에 연구부에 처음 부임하여 열심히 학교생활에 적응할 즈음의 어느 날, 내 운명을 바꾸는 사건이 있었다. 교감선생님이 나를 보자고 하시더니 나의 의향은 무시한 채 농촌출신이니 한번 4-H회를 맡아보라고 한것이 4-H인생의 시작이다.
그러던 중 당시 성남시농업기술센터 인력육성과 청소년교육을 담당했던 이양재 현 IPYE 부회장을 통해 진정한 4-H인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90년대 초 농업기술센터로부터 지원금을 많이 받아 오는 것이 나의 능력인줄 알고 행사 때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동원시켜 관계자들로부터 좋은 인식을 심어주는데 많은 노력을 했었다. 그러다보니 여름방학 야영대회 때는 많은 학생의 수가 참가하게 되고 봉화식과 교육훈련을 마치면서 4-H를 사랑하는 학생이 많아지고, 그들이 졸업한 후에도 후배들을 잊지 못해 챙겨주는 것을 보면 밀려오는 뿌듯함을 주체할 수 없었다.
90년대 후반기부터는 센터의 지원금도 줄어들고 나 역시 4-H를 조금은 알게되어 교내에서 자발적으로 매월 나무이름 맞추기와 나무가 가진 특성 및 꽃 이름 맞추기 등 주제를 정해 시험을 보고, 높은 점수가 나온 회원을 우수회원으로 선발해 연말 경진대회 때 센터소장 표창을 받도록 했다.
2000년대 접어들어 4-H지도교사로써 시련이 닥쳐왔다. 4-H가 교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동아리로 자리 잡고 회원들이 모범적으로 활동하자 학교에서는 4-H실(室)을 만들어줬다. 4-H실이라는 표찰을 다는 날, 나와 회원들은 너무 기뻐 과자파티를 하고 노래도 부르며 멋진 동아리로 거듭나자고 다짐도 했는데, 이 4-H실이 문제의 발단이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점심시간 일찍 밥을 먹은 회원들이 4-H실에 모여 즐겁게 쉬는 것도 몇 개월 안돼 버릇없는 후배들을 교육시킨다며 선배들이 매일 벌을 주는 장소로 변했다. 또 그 벌이라는 것이 강도가 심해져 차마 학생들이 했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고, 마침내 회원 한명이 부모님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함으로써 알게 됐다.
학생들이 복도를 볼 수 있도록 거울을 달아놓고 내가 복도 입구에 들어서면 하던 행동을 멈추고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 결과 4-H동아리는 해체됐다.
이듬해 다시 부활했지만 나에게는 결코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며, 나에게 있어 4-H란 진정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일이었다.
16년간 정들었던 성일여자고등학교를 떠나 성일정보고등학교에서 신임의 기분으로 4-H를 계속 맡을 수 있어 무엇보다도 즐겁고, 인문계 학생들처럼 대학입시의 중압감이 적은 실업계 학생들과의 4-H활동도 참으로 재미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일지라도 서로 하려고 하는 모습이나 행동을 볼 때 ‘이곳에서도 즐겁게 4-H활동을 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에 기쁨의 희열이 몸속에서 끓는다.
4-H 때문에 즐거웠던 일, 4-H 때문에 긴장했던 일, 4-H 때문에 관리자 분들과 소원했던 일, 지금 생각해보면 먼 전설인 것 같다. 천성이 한곳에 앉아 있기 보다는 움직임을 좋아하고 새로운 사람 사귐과 도시보다는 시골을 항상 그리워하는 내 마음이 지·덕·노·체의 4-H의 뜻과 같다면 나는 정녕 4-H라는 다람쥐 쳇바퀴에서 오늘도 내려오지 못하는가 보다.
 
 〈경기도 성남시
 성일정보고등학교4-H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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