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1 격주간 제926호>
[이도환의 고전산책] 끝이 없는 길
"무한대로 확장되는 네모에는 모서리가 없다
大方無隅(대방무우)"
- 《도덕경(道德經)》 중에서


유가(儒家)의 공부는 자신을 바르게 가다듬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도착지점은 어디인가. 세상 전체를 바르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전체를 바르게 만드는 일은 가능한 것일까. 《논어(論語)》를 보면 이에 대한 희미한 실마리가 나온다.
어느 날,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석문(石門)’이라는 곳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석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자로에게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자로가 ‘나는 공자의 제자인 자로라고 한다’고 대답하자 문지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한다. “아, 공자?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계속 하려고 달려든다는 그 사람 말이오?”
세상 전체를 바르게 만드는 일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이처럼 확실한 대답이 또 있을까 싶다. 학자가 아니라 문지기가 이 말을 했다는 것 또한 의미가 깊다.
유가의 공부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여긴다. 더 나아가 ‘공부의 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매일 새롭게 혁신하는 과정 자체가 학문이며 올바른 삶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우주에 끝이 없는 것처럼 학문에도 끝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완성의 단계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예로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구절을 내세우기도 한다.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것은 크게 될 사람은 늦게라도 성공한다는 뜻이니 이는 완성의 단계를 말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한다. 과연 그럴까?
‘대기만성(大器晩成)’은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말이다. 앞뒤 맥락을 살피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도덕경(道德經)》에 등장하는 전체 문장은 다음과 같다. 
“무한대로 확장되는 큰 네모에는 모서리가 없고(大方無隅) 무한대로 확장하는 큰 그릇은 채워지지 않으며(大器晩成) 엄청나게 큰 소리는 귀에 들리지 않고(大音希聲) 엄청나게 큰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大象無形). 올바른 이치는 이처럼 은밀하여 무엇이라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道隱無名).”
유가의 학문이 추구하는 것은 중용(中庸)이며 시중(時中)이다.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때와 장소에 맞도록 적절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게다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바르게 가다듬고 이를 널리 퍼져나가게 만들어 세상 전체가 조화롭고 평화롭게 되는 것을 추구한다. 그러니 끝이 없다. 모서리도 없고 완성되지도 않으며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거나 귀로 들을 수도 없다.
모호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전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100명의 사람이 100가지의 삶을 살아간다. 무엇 하나를 구체적으로 찍어서 ‘이것이 올바름이다’라고 제시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도(道)’가 이러하니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그 반응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학문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은 부지런히 실천에 옮기고(勤而行之), 어중간한 사람은 반신반의하며 때론 실천하기도 하다가 때론 헛짓을 한다(若存若亡).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은 낄낄거리며 비웃는다(大笑之). 올바름에 대해서 듣고도 그들이 웃지 않으면 그것은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라 할 수 있다(不笑 不足以爲道).”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말이다.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계속 하려고 달려든다고 누군가 비웃거든 기뻐하라.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니까.
이도환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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