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5 격주간 제923호>
[이달의착한나들이] 행복저장노트

웃는 길.

내 고향은 강원도다.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인데 산의 초록 테두리는 언제나 새로 칠을 해놓은 듯 싱싱했다. 소나기가 지나가면 피어오르던 안개. 안개는 엄마처럼 눈물 젖은 산을 안고 어루만져주었다.
산골 사람은 산에 기대어 산다. 봄이면 산나물, 두릅, 버섯을 찾아 산으로 간다. 엄마를 따라 산에 오르면 엄마는 나뭇가지에 막 돋아난 어린잎들을 눈부신 듯 바라보았다. “이렇게 딱딱한 나무에서 어찌 이리 연한 것들이 나오나!” 나는 그렇게 산이 준 것들을 먹고 자랐다.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서울로 온 건 중학교 때. 길도 학교도 친구도 낯설어 모든 게 긴장상태였다. 사람조심 길조심을 하며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에 시달릴 때였는데 어느 날 감전 된 듯 길에 멈추어 섰다. 보도블록 사이의 초록색 풀이 눈에 띈 것이다. 이게 얼마만인가! 그 경이로움이라니! 나는 심봉사가 눈을 뜬 듯 풀을 보았다. 무언가 뭉클하고 솟구쳐 올라와 숨이 턱 막혔다. 고향에선 어디서나 지천이던 잡초! 그때 곁에 있던 얼굴 하얀 사촌언니가 나를 잡아끌었다. “돈이라도 떨어진 줄 알았잖니!”
삶이 힘들수록 순수한 행복과 위로를 주는 건 자연이다. 그러나 그런 기쁨의 전율은 물질과 달리 금세 휘발된다. 나는 그런 느낌이 소중해 행복저장노트를 쓴다. 살아가다 무심결에 “아! 좋다!” 라는 말이 튀어나올 때, 그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다. “아! 좋다!”는 말은 꽃이 피듯 절로 나온다. 그런 말엔 거짓이 있을 수 없다.
두 살 된 손자 도경이는 화분에 올려놓은 작은 돌들을 제일 좋아한다. 밥 먹을 때도 양손에 꼭 쥐고 놓지 않는다. 화폐의 가치와 먼 아이들은 어른보다 얼마나 더 행복한가! 나의 행복저장노트도 그 아이의 돌멩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길을 가다가 추억 속 옛 노래가 들려올 때, 가파른 산을 오르다 스치는 한 줄기 바람, 봄밤의 라일락 향기, 장마 끝에 열리는 쪽빛 하늘, 뒤돌아서다 눈이 마주치는 저녁노을, “아! 좋다!” 신음처럼 중얼거리며 몸을 담그는 따끈한 목욕물…….
요즘엔 봄꽃이 한창이다. 며칠 전 아차산에 올랐을 때 짧은 탄성을 질렀다. 겨우내 쓸쓸하기만 했던 산길에 그리운 진달래가 마중 나와 있었다. 나는 고마워 그 길을 돌아서서 다시 걸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 행복저장노트에 붙였다. ‘웃는 길’이란 제목과 함께.
우리 할머니는 90이 넘도록 꽃밭을 가꾸었다. 평생의 일인데도 매번 놀라며 채송화고 해바라기고 똑같이 칭찬해주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때마다 환하게 빛나던 할머니 얼굴.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자연의 신비에 더 이상 경탄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경탄이 아닌 비명을 지르고 있다. 신종플루, 사스, 메르스의 주기적인 창궐에 이어 현재 전 세계적으로 사망자가 폭증하고 있는 코로나19도 결국은 환경오염으로 인한 자연 생태계의 파괴가 원인이라고 한다. 나는 손자가 아름다운 자연을 찬미하며 살아가길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그의 기억 속에 행복저장노트를 꽃밭처럼 일구다 간 할머니로 남고 싶다.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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