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1 격주간 제914호>
[이도환의 고전산책] 이명증(耳鳴症)에 걸린 아이

"나의 단점을 지적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스승으로 생각하라
一道吾惡者 是吾師(도오악자 시오사)"
- 《명심보감(明心寶鑑)》 중에서


《열하일기》, 《허생전》 등을 쓴 조선후기의 학자 박지원(朴趾源)은 흔히 ‘북학(北學)의 선두주자’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북학(北學)’이란 무엇일까.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등 청나라와의 혹독한 전쟁을 경험한 조선에서는 청나라를 공격해야 한다는 이른바 ‘북벌론(北伐論)’이 힘을 얻고 있었다. 앞선 두 차례의 전쟁은 청나라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한 경험이었다. 조선의 왕이 무릎을 꿇고 항복을 선언했으며 항복 후에는 사대 외교를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학자들은 청나라를 여전히 ‘오랑캐’라고 비하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북벌(北伐)은 조선의 정치와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이 되었다. 이러한 ‘북벌론(北伐論)’의 대척점에 있던 것이 바로 ‘북학(北學)’이었다.
오랑캐가 세운 근본이 없는 나라인 청나라가 멸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중국의 주인으로 굳건하게 힘을 키워나가자 청나라는 정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배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북학(北學)’이라는 용어 자체는 당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맹자(孟子)》에도 ‘북학(北學)’이라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맹자(孟子)》의 「등문공장구(騰文公章句)」를 보면 “남쪽에 위치한 초(楚)나라 사람인 진량(陳良)이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도(道)를 흠모해, 북쪽에 있는 중국으로 와서 학문을 배웠다(北學於中國)”는 내용이 나온다.
‘북학(北學)’을 주장한 이유는 청나라를 오랑캐라 여기지 말고 실질적인 선진국으로 받아들여 그들의 발전된 문물을 배우자는 실용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북학(北學)을 주장한 학자들은 유학(儒學)을 배운 사람들이었다. 다만 전통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청나라를 긍정하고 그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유연성·개방성을 지녔을 뿐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박지원이었다. 그의 글은 내용 뿐만이 아니라 그 문체 자체도 매우 파격적이었다. 때문에 임금인 정조(正祖)에게 지적을 받기도 했다. “<열하일기>가 발표된 후에 이를 읽은 정조는 1792년(정조 16) 남공철을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근래 신기한 것만을 따르는 문체의 주범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라고 하면서 남공철로 하여금 편지를 보내도록 해서, 속히 문체의 잘못을 인정하고 순정하게 수정한다면 관직 제수도 마다하지 않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중죄로 다스릴 것이라고 전하도록 했다. 남공철의 편지를 받은 박지원은 자신의 문체가 잘못되었다는 속죄의 편지를 보냈으며, 이를 받아 본 정조는 그의 문재(文才)를 칭찬하며 더 이상은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하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였는지 직접 그의 글을 살펴보자.
“어린아이가 마당에서 놀다가 깜짝 놀라며 옆에 있던 아이에게 말했다. “너 이 소리 들리니? 지금 내 귀에서 앵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마치 피리를 연주하는 것과 같아.” 옆에 있던 아이가 그 아이의 귀에 자신의 귀를 대고 가만히 들어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그러자 귀에서 소리가 난다고 했던 아이는 꺼이꺼이 울부짖으며 속상해했다.”
이명(耳鳴)을 앓고 있는 아이의 이야기다. 박지원은 “공부도 마찬가지다. 별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 것만 대단한 줄 안다. 이명증(耳鳴症)에 걸린 것인데 말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나의 단점을 지적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스승으로 생각하라(道吾惡者 是吾師)”는 《명심보감(明心寶鑑)》의 충고가 떠오른다.
이도환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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