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인 현 회장 (전남 장흥군4-H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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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군4-H동문회의 재무를 맡았던 남인현 회장은 ‘장흥군4-H 50주년 기념탑 건립’을 위해 2,200만원의 기금조성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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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마을 곳곳의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를 들으며 온 국민이 ‘나도 한번 잘살아보자’는 목표로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던 1976년.
이제 막 전주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청년 남인현은 농촌에서 자신이 할 역할이 많을 것이라는 부푼 꿈을 안고, 전주에서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76년 2월 전주농고 축산과를 졸업하고 홀로 계시는 어머님을 모시며 축산업을 할 생각으로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때부터 저와 한평생을 같이 한 4-H와의 만남이 시작되었죠.”
고향으로 돌아온 남인현 회장(63·전남 장흥군 장평면 탑동리)은 막연하게 생각했던 자신의 역할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마을 재건에 앞장섰던 청년들 대부분은 먹고 살기에 바빠 학업을 포기하고 생업을 선택하였습니다.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만 졸업한 친구들이 태반이었죠. 그렇기에 농업을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배운 제가 분명 농촌 발전에 미약하나마 보탬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의욕만 있다고 혼자서 모든 걸 전부 할 수는 없는 법. 청년 남인현은 마을 재건의 역군들과 함께 하고자 고향을 찾자마자 바로 탑동4-H구락부에 가입했다.
활동 시작과 함께 탑동4-H구락부에서 탁월한 리더십으로 두각을 나타낸 남인현 회장은 그다음 해인 1977년 장평면4-H연합회장, 1978년에 장평군4-H연합회 임원 그리고 1979년에는 장평군4-H연합회장에 선출되는 기염을 토해낸다.
“군연합회장을 맡을 때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저보다 4-H경력이 많은 선배님을 비롯해 동기들이 있는데 4-H활동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제가 감히 군연합회장이 되어 의사봉을 손에 쥐어도 되는 걸까 하고 고심을 거듭했죠.”
남인현 회장의 이런 고민은 기우에 불과했다. 회장을 맡을 사람은 너밖에 없다는 회원들의 믿음은 큰 성과로 결실이 돌아왔다.
회장직을 맡은 그 해 장흥군4-H연합회는 전남도4-H경진대회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해 전남도를 대표해 제24회 새마을청소년중앙경진대회(1980년)에 참가한 것이다.
“도 대회에 단체 포크댄스로 참가해 최우상을 받았습니다. 당시 참가했던 포크댄스는 단순한 포크댄스가 아니라 연극을 결합한 일종의 뮤지컬 같은 형식의 포크댄스였죠.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공연이었습니다. 그 공연을 기획하기 위해 밭을 갈다가도 회의 시간이 되면 참석하여 회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거듭했습니다.”
가슴으로 전하는 4-H
이렇게 4-H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던 청년 남인현은 국가의 부름을 받으면서 4-H를 잠시 가슴에 묻어두었다가 군 제대 후 후배들의 가슴에 4-H를 전하는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제가 군대를 제대하고 장평농협에 입사하고 나니 회원으로 활동하기에는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4-H를 후배들에게 이어주는 게 제 사명이라는 생각하고 장흥군4-H동문회에 가입했습니다.“
지도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남다른 추진력을 발휘한 남인현 회장은 2006년 동문회의 재무를 담당했을 당시 ‘장흥군4-H 50주년 기념탑’ 건립모금에 앞장섰고 2012년 장흥군4-H본부의 사단법인화에 적극적으로 나서 지도자의 귀감이 되기도 했다.
“사회든, 단체든 올바른 리더가 있어야 합니다. 앞장서는 리더가 있어야 모든 일이 이루어집니다. 다들 곤혹스러워하고 어려워할 때 솔선수범하여 목표달성을 위해 이끄는 것이 바로 리더입니다. 50주년 기념탑 건립도 그러한 리더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끝으로 오늘도 4-H인으로 4-H인답게 살아갈 것이라는 전하는 그의 말에서 기자 가슴 속의 네잎클로버도 더욱 진해진 듯했다.
배대용 기자 erro8382@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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