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15 격주간 제903호>
[기고문] 농업·농촌의 뿌리 4-H를 알자

이 용 정 (전라남도4-H본부 사무처장)

필자가 4-H를 처음 접한 때는 1961년(10살)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3학년 때이다. 그때는 4-H가 무엇인지 모르고 4-H에 열정이 많으신 마을지도자 분께서 저녁에 마을회관으로 나오라고 해서 나간 것이 4-H와 인연이 된 것이다. 우리 마을은 50호 정도가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는 집성촌 마을로서 그 시절에 마을회관이 있을 정도였으니 그래도 꽤 괜찮은 마을이었던 모양이다.
때는 추위가 아직 풀리지 않은 3월 초였다. 회관 마룻바닥에 멍석을 깔고 난로도 없이 손을 호호 불면서 전기불도 아닌 호롱불 밑에서 붓으로 그린 4-H기와 태극기, 회의 순서를 벽에 붙여 놓고 회의를 했던 것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하니 4-H회원 가입식인 것이다. 이제 10살이 되었으니 지도자님께서 4-H회에 가입하라고 회관으로 나오라고 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지금 와서 교재를 뒤져보니 그 당시 4-H회원 연령은 10~20세였다.
가입식이 끝나고 회의를 했는데 회의 주제는 마을안길과 우물(샘) 청소였다. 회장은 필자보다 5살 많은 중학생이었는데 회의진행을 아주 잘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후 매월 개최되는 월례회의에 참석하면서 이 회의를 통해 나는 민주주의 기본원칙과 절차의 중요성을 배워 현직 공직생활 때 잘 활용했다.
당시 우리 농촌에는 먹을 것이 없어 “삐비”라는 풀을 뽑아 먹었고 5월 말 보리가 익어 갈 때쯤이면 모내기 때 퇴비로 사용하려고 논 귀퉁이에 산에서 베어다 놓은 마른 산야초로 불을 피워 보리나 밀을 구워 먹곤 했다. 그 때는 쌀밥 한 그릇, 쌀 한 톨 없는 꽁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어 보는 것이 소원이던 시절이었다.
자료에 의하면 1960년 우리나라 국민 1인당 GDP는 80$에 불과했으니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으며 식량이나 건축 기술들도 주로 외국 차관이나 원조에 의존했다. 지금 서울특별시 중구에 소재한 장충체육관도 필리핀의 원조 기술에 의해 건축되었다 하니 얼마나 건축 기술이 없고 가난한 나라였는지를 알 수 있다. 
또, 당시에는 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부족하여 글을 못 배웠고 학교에 납부할 돈이 없어 학업도 포기해야 했던 안타까운 현상도 속출했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농업 농촌에 뿌리를 둔 4-H는 농촌계몽운동, 농촌재건운동, 생활환경개선 운동, 새마을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특히 1970년대 농촌진흥청에서 식량자급과 연중 사시사철 신선채소 생산 공급을 위해 추진하는 녹색혁명과 비닐 백색혁명의 기수역할을 해 세계 여러 나라가 부러워하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데 4-H가 함께 했다는 데 대해서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4-H운동은 국가의 장래를 이끌어가는 청소년들이 4-H회의 단체 활동을 통해 4-H이념을 생활화함으로써 인격을 도야하고 농심을 배양하며 창조적 미래세대로 성장토록 하는 지역사회 청소년 교육운동이다.
1902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1947년에 도입된 한국4-H운동은 4-H회원들로 하여금 새 품종과 새 기술을 일선 현장에서 선도 실천함으로써 농업과 국가경제발전의 밑거름 역할을 돈독히 했다. 한국4-H본부 자료에 의하면 전국 4-H가족은 450만명에 이른다. 이분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나라가 농업기술 선진강국으로 도약했다고 생각한다.
7~80년대 4-H활동을 하였던 분들은 지금도 일선 산업현장의 역군으로 일하고 있으니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아 소중한 4-H가 다시 한 번 농업·농촌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농업·농촌의 뿌리인 4-H의 저력을 한국4-H운동 72주년 상반기를 보내면서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이를 발판으로 우리 4-H가 미래를 향해 더 정진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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