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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5 격주간 제89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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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착한나들이] 봄은 보라고 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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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린 줄기에서 종소리가 울려왔다. |
생의 쓰라린 고비를 넘어 이제 막 봄의 비탈을 딛고 올라선 연둣빛 나무들. 그들의 눈빛이 보고 싶어 아차산에 올랐다. 봄나무를 보면 잃어버린 사람이 돌아온 듯 반갑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 새순에 가만히 손끝을 대어 보게 된다.
“아이구 이거 좀 보시게. 신기하구먼.” 두런거리는 소리에 돌아보니 할머니들이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나이에도 신기한 게 있구나 싶어 다가가 보았더니 그곳엔 나무 그루터기가 뎅그러니 앉아 있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람으로 치면 손도 발도 몸뚱어리도 없는, 나무라고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그것이 가장자리에 푸른 줄기를 솟구쳐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막힌 반전이었다. 순간, 그 여린 줄기에서 종소리가 울려왔다. 그건 우리 동네 두부장수할아버지의 종소리였다.
할아버지는 동네 사람이라면 다 아는 유명인사다. 뚝섬에 나룻배가 다닐 때부터 두부를 만들어 팔아왔다고 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김없이 종을 흔들며 나타나는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두부는 따듯했고 고소했고 값이 쌌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종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걸 깨달은 건 종소리가 끊긴 지 한참 뒤였다. 이후 동네 사람들은 서로 두부장수 안부를 물었고 나와 남편도 은근히 창문을 열어 놓고 귀를 기울였지만 허사였다.
할아버지는 체격이 작고 왜소했지만 부지런하고 성실했다. 겉은 나무처럼 무뚝뚝했지만 속은 두부처럼 말랑해서 오랜 단골인 동네 할머니들에겐 인기최고였다. 저녁이면 할머니들은 의자에 나와 앉아 수다를 떨며 할아버지가 오기를 기다렸다. 아마도 그분들은 새삼 절감할 것이다. 세상엔 종소리가 울려오는 저녁과 그렇지 않은 저녁이 있다는 걸.
어느 날 마트 앞에서 두부상자를 옮기는 사람을 붙들고 한 여자가 더듬거리고 있었다. “저, 저기요. 혹시 종을 울리며 리어카 끌고 다니는 두부장수 할아버지 모르세요?”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떠나고 나는 그녀 곁에 멍하니 서있었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면서. 할아버지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할까? 왠지 절망적인 생각이 들어 힘이 빠졌다. “혹시 돌아가신 건 아닐까요?” 나는 그 말을 꿀꺽 삼키고 돌아섰다.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어느 날 죽은 나무둥치에서 뻗어 나오는 연둣빛 줄기처럼 댕그랑 댕그랑 종소리가 울려올지도 모른다고. 그날이 오면 또다시 집집마다 사람들이 달려 나와 웃음꽃이 피리라. 부엌마다 지글지글 두부 부치는 소리가 움트는 봄날처럼 설레리라.
봄은 보라고 온다. 죽었던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는 걸 보라고 온다. 앞만 보고 종종걸음 치던 나는 산에 올라 타인의 삶을 본다. 그루터기 앞에서 아무 연고도 없는 두부장수할아버지를 그리워하다가 진달래 앞에 서서 굶어 죽어가는 먼 나라 아이들을 생각하다가 세상엔 봄 같은 사람과 겨울 같은 사람이 있음을 떠올린다.
산에서 내려오다 다리를 절며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을 보았다. 지팡이를 짚고 자주 멈추어 서는 그 남자의 등에 봄볕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환한 타인의 등에 나도 가만히 손을 대보고 싶어졌다.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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