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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5 격주간 제88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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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착한나들이] 죽음, 그 이후를 보다 |
- 강원도 봉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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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한 쌍이 메밀 꽃밭 속에 그림처럼 서있었다. |
내게 죽음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깨닫게 해준 건 사람이 아니고 나무였다. 그 나무를 만난 건 강원도 봉평에 있는 숲이었다. 숲해설가를 따라 들어선 숲속엔 오래된 소나무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존재감을 푸르게 빛내고 있었다. 해설가는 자신을 닮은 나무를 찾아가라고 했다.
나는 한 나무에게로 걸어갔다. 그 나무는 우람하게 죽죽 뻗은 나무들 가운데 가장 초라해 보이는 나무였다. 밑둥치가 뒤틀려 쓰러질 듯 서있는 나무를 나는 친구처럼 안아주었다. 내 이름을 말해주고 비에 젖은 나무를 쓰다듬어주었다. 까끌한 껍질에 볼을 대자 빗물이 눈물처럼 느껴졌다. 해설가가 나무가 되어 하늘을 보라고 했을 때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올려다 본 나뭇가지엔 잎이 하나도 없었다. 그건 시커멓게 죽은 나무였다. 나는 나무의 주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나무엔 크고 작은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건 딱따구리가 애벌레를 파먹은 자리였다. 가지가 부러진 자리엔 이끼가 덮여있었고 이끼는 어린 떡잎을 뽑아 올리고 있었다. 밑둥치엔 개미가 줄줄이 기어오르고 드러난 뿌리엔 누군가의 생명이 될 작은 버섯이 꽃처럼 피어있었다. 나무의 죽은 세포는 살아있는 생명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기대지 않고 살아가는 생명체는 이 별에 없다. 죽은 나무가 사라지려면 수백 년이 걸린다고 한다. 나무는 죽은 후 온갖 생명을 부양하며 자신이 태어난 숲을 풍성하게 한다. 죽음은 아름다운 순환이다. 순환이 멈추면 생명도 멈춘다. 죽음은 희망이다. 죽음이 있어 나무는 버섯이 된다.
해설가가 내게 물었다. “왜 이 나무를 선택했나요? 이 나무를 선택한 사람은 처음이네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지난날이 떠올라서였다.
건강검진을 받고 집으로 돌아온 날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암인 것 같으니 재검을 하자고. 결과는 췌장암! 일산 암병원으로 당장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죽음을 만났다. 비켜 갈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나는 무력했고 화가 났다. 밤 새워 인터넷을 뒤졌는데 췌장암이란 생존율이 지극히 낮은 암이었다. 나는 모든 걸 포기했다. 그리고 아무도 몰래 죽음을 준비했다. 남편의 와이셔츠도 사두고 보험증서도 찾아놓고 마지막 주변 정리를 했다. 당시 내게 있어 죽음은 모든 관계의 단절을 의미했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굴러갈 테니까. 그것이 9년 전, 그러나 나는 아직 무슨 기적인지 살아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죽음, 그 이후를 생각한다.
돌아오면서 봉평 메밀꽃 축제 현장에 들렀다. 지천으로 피어있는 메밀꽃은 비에 젖어서도 하얗게 웃고 있었다. 메밀꽃을 보며 점심에 먹은 메밀국수를 생각했다. 생명은 공생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생명의 빛을 발한다. 저만치 청춘 남녀 한 쌍이 메밀 꽃밭 속에 그림처럼 서있었다. 나는 갑자기 삶이 눈부셔 눈물이 났다. 나는 그들을 보며 루게릭병 환자 모리의 말을 떠올렸다.
- 죽음은 생명이 끝나는 것이지 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잊힐 거라는 절망 때문이다. 〈친밀한 사랑의 감정〉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잊히지 않는 죽음을 죽을 수 있다. -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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