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15 격주간 제877호>
[이도환의 고전산책] 효도의 대상은 부모만이 아니다

"성난 얼굴로 거슬리는 말을 급하게 더하지 말라
不可遽加色佛言(불가거가려색불언)"
- 《격몽요결(擊蒙要訣)》 중에서


유가(儒家)에서 강조하는 효(孝)는 여러 가지 개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나를 낳아준 부모를 따르는 게 ‘효(孝)’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다만 시작점일 뿐이다.
효(孝)는 그 의미로 볼 때 효(效)와 연결된다. 이 세상을 만들어낸 하늘(天)의 뜻을 깨우쳐 이를 본받는 것을 ‘효(效)’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잘 본받아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을 ‘효과(效果)’라고 한다. 그러므로 ‘효(效)’는 ‘본받는다, 배운다, 노력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효(孝)’도 마찬가지다. 아들(子)이 노인(老)을 업고 있는 모양이다. 부모와 조상을 잘 섬기고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세상이 만들어진 원리인 선(善)한 이치를 따르는 것은 ‘효(效)’이면서 ‘효(孝)’이기도 하다.
‘효(效)’는 서로 소통한다는 의미를 지닌 ‘교(交)’와 채찍질한다는 의미를 지닌 ‘복()’이 합쳐진 글자다. 누구와 소통하는가. 조상들과 후손들, 일가친척들과 이웃들을 모두 포함한다. 그 시작점이 바로 부모가 나를 낳은 것이므로 그것을 시작점으로 삼지만 그것에 얽매이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채찍질하는가. 나 혼자만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을 버리기 위한 채찍질이다. 지금 이 순간의 짧은 기쁨만을 생각하고 뒷일은 생각하지 않는 것, ‘남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하는 것,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다른 사람을 왜 생각해?’라는 생각 등이 사라지도록 채찍질하는 것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다른 누군가와 협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아기는 부모의 보살핌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태어나자마자 걷고 뛰는 다른 동물들과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늙은 노인도 자식의 도움이 필요하다. 젊은 청장년은 자식과 부모를 동시에 돌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웃의 도움이 절실하다. 이러한 관계를 연결하는 것이 ‘효(效)’이며 동시에 ‘효(孝)’이기도 하다. ‘효(效)’와 ‘효(孝)’의 상대어는 ‘나만 생각하는 것’이다.
“내 형제는 나와 한 몸이다. 부모가 주신 몸을 함께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제를 대할 때는 나를 대할 때처럼 해야 한다. 서로 살뜰하게 돌보아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형은 굶주리는데 아우는 배부르고, 아우는 추운데 형은 따뜻하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손은 편안한데 발은 병들어 있다면, 그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형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느 한쪽이 어려움이 처하면 모두가 어려운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형제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부모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형제의 우애는 효도와 연결되는 것이다. 형제 사이에 서로 뜻이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성을 높이거나 감정을 앞세우지 말고 차근차근 이치에 맞게 설명하여 조화로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만약 형제가 선하지 못한 행동을 하더라도 성난 얼굴로 거슬리는 말을 급하게 더하지 말고(不可遽加色佛言) 정성을 다해 설득하고 이해시켜 깨닫도록 해야 한다.”
율곡의 말이다. 효(孝)는 이처럼 형제와도 이어진다. 더 크게 넓히면 세상의 모든 것들로 퍼져나간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효(效)가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서로 외면하던 남과 북이 서로 만나는 것도 효(孝)의 연장선에 있다. 그런데 서로 뜻이 맞지 않는다 하여 언성을 높이거나 상대방의 선하지 못한 행동에 대해 성난 얼굴로 거슬리는 말을 해야 할까? ‘정성을 다해 설득하고 이해시켜 깨닫도록 해야 한다’는 율곡의 충고에 귀를 기울일 때다. 그래야만 효과(效果)를 볼 수 있다.
 〈이도환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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