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01 격주간 제872호>
[이도환의 고전산책] 나를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
"스스로를 업신여긴 뒤에 남이 나를 업신여긴다
人必自侮 然後人侮之(인필자모 연후인모지)"
- 《맹자(孟子)》 중에서


‘학을 떼다’라는 말은 요즘도 심심치 않게 쓰이는 표현이다. 괴롭거나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느라고 진땀을 빼거나, 그것에 거의 질려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학창 시절에 수학이라면 거의 학을 뗐다”라고 한다면 수학이라는 과목이 너무 어려워 지금도 고개를 흔들 정도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학’은 무엇일까. 학질(疾)을 뜻한다. 그러므로 ‘학을 떼다’는 학질에 걸려 끙끙 앓다가 겨우 벗어났다는 뜻이 된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학을 뗐다’는 표현이 생겼겠는가. 학질은 말라리아에 감염된 것을 말한다. 말라리아란 말라리아 병원충을 가진 학질모기에게 물려서 감염되는 병으로 갑자기 고열이 나며 설사와 구토·발작을 일으키고 빈혈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학질은 사람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포악스러운 질병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얼마나 모질고 고통스러웠으면 그 이름에 모질고 험악하다는 뜻을 지닌 학(虐)에 병을 뜻하는 부수 ‘’를 붙였겠는가. ‘동의보감’을 보면 ‘처음 발작할 때에는 먼저 솜털이 일어나고 하품이 나고 춥고 떨리면서 턱이 마주치고 허리와 잔등이 다 아프다. 춥던 것이 멎으면 겉과 속이 다 열이 나면서 머리가 터지는 것처럼 아프고 갈증이 나서 찬물만 마시려고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 여름에도 덜덜 떨며 지내야 하는 병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인이었던 이정구(李廷龜)는 젊은 나이에 대제학에 오른 후 병조판서·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을 지낸 당대 최고의 정치인으로 출세 가도를 달렸던 인물이다. 문장으로도 이름이 높아 정조대왕은 그의 문장을 크게 칭찬하기도 했다. 그런 그도 학질을 피하지 못했다. 학질에 걸린 그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병마와 싸우기 시작했다. 3년을 앓았지만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한 과정 속에 그가 지은 글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송학문(送文)’이다. ‘학질에게 안녕을 고하는 글’ 정도가 될 것이다. ‘학을 뗀’ 경험을 글로 지은 것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자. 학질에게 이정구가 건네는 말이 먼저 나온다.
“혼백이 달아나 마치 미치광이나 바보와 같고 마음이 두렵고 어수선하여 날로 기운이 쇠진해지니 이 모두가 그대의 짓이다.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토록 괴롭게 학대하며, 무슨 미련이 있기에 이토록 오래 머물고 있는가. 머뭇거리지 말고 훌쩍 떠나가라.” 그 다음에 학질이 이정구에게 하는 말이 이어진다. “나무가 썩으면 날짐승이 모여들고 고기가 썩으면 벌레가 생기게 된다.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망가진 후에 외적이 쳐들어오고,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몸을 허약하게 만든 후에 병이 쳐들어오는 법이다.”
결국 학질인 나의 잘못이 아니라 이정구, 너의 잘못이 병을 부른 것이라는 뜻이다. 그 이유를 조목조목 들어 이정구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평소 음식을 함부로 먹고 운동은 하지 않은 것, 근심과 걱정으로 기력을 해친 것, 초상을 치르느라 극도로 몸을 훼손한 것 등을 논하며 명예와 이익을 쫓아 벼슬자리를 탐낸 것도 지적한다. 학질이 하는 말이라고 되어 있으나 사실은 이정구의 자아비판인 셈이다.
이정구와 학질의 대화는 ‘맹자(孟子)’에 나오는 한 대목의 패러디다.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를 업신여긴 뒤에 남이 업신여기고, 집안은 반드시 스스로 망친 뒤에 남이 망치며,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공격한 뒤에 남이 공격하는 것이다(人必自侮 然後人侮之 家必自毁 而後人毁之 國必自伐 而後人伐之).”
스스로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나를 함부로 다루는데 누가 나를 존중해주겠는가.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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