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스승의 날이었다. 잘 알고 지내는 비구니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학승들 몇이 모여 어른 스님께 스승의 날 감사 꽃바구니를 하나 인터넷으로 주문하려고 하는데 카드결제를 하라고 한다는 것이다. 함께 있는 학승들 가운데 카드를 갖고 있는 분이 한분도 없어서 고민하다가 나한테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그 비구니 스님의 부탁을 받아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내 카드로 대신 결제를 했다. 결제를 마쳤다는 전화를 드리자 “보살님 통장번호 불러주세요. 며칠 후 밖에 나가면 꽃값 송금할게요.” 하시는 것이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으신 학승이신 것을 아는 터라 “스님, 그 돈으로 다음에 삼천배 하실 때 음료수라도 장만하세요. 번거롭게 송금하시러 나가지 마시고요.” 라는 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보름쯤 지난 어느 날 그 스님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그 스님과 내가 통화한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스님: 보살님, 말 좀 바꿔서 해주시면 안 될까 해서요. 나: 무슨 일이세요? 스님: 아니, 저번에 꽃값 안 받으신다고 하면서, 그 돈으로 삼천배 할 때 음료수 사라고 하셨잖아요. 보살님. 나: 네, 스님 그렇게 말씀드렸었지요. 스님: 그래서 말인데요. 그 말 좀 바꿔주셨으면 해서요. 나: 어떻게 바꿔드릴까요? 스님: 그 말을 바꿔서 책 사서 보라고 해주시면 안 될까요?
사정 이야기를 들어보니 범어 사전이 없어서 하나 사야겠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음료수 사라고 한 말을 ‘스님 그 돈으로 필요한 책 사서 보세요.’ 라고 바꿔 달라는 것이다. 대중 행사 때 음료수 사라고 한 돈으로 본인의 책을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슴이 뻥 뚫리는 묘한 느낌으로 잠시 말을 못하고 있다가 “네, 스님. 그 돈으로 필요한 책 사서 보세요.” 라고 했더니,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스님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고맙습니다. 보살님. 그만 끊어요. 책방에 가야해요.”
그 날 나는 가슴이 뜨겁고 아려서 한 참 동안 하늘을 보았다. 내가 스님께 음료수라도 사세요라는 말을 했을 때, 그 돈으로 꼭 삼천배하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 음료수를 공양해야만 한다고 한 것이 아닌 줄은 삼척동자도 알지 않을까? 그저 번거롭게 꽃값을 송금하러 마을까지 내려오시지 말고 필요한데 쓰시라고 보시한 것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중을 위해 쓰라고 보시한 돈으로 본인의 책을 사는 것이 마음이 불편하여 말을 바꿔서 다시 한 번 해달라고 부탁하는 스님의 고운 마음이 고맙기도 하고, 공부할 책 한 권도 선뜻 살 수 없는 스님의 주머니 사정이 안쓰럽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