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남산여자 고등학교 4-H 제 28대 2학년 이진아
농촌, 시골이라고 하면 보통 사람들에게는 꾸불꾸불하고 울퉁불퉁한 길이나 거름 냄새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농촌이 나에게는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오래 전에 누군가가 내게 농촌에 대해 물었을 때 나는 서슴지 않고서 살기 좋고 아름다운 곳이라 했었다. 몇 번을 되물었을 때에도 내 대답은 변하지 않았었다. 지금 당장 묻더라도 대답은 같을 것이다.
지금은 대구라는 도시에 살고 있지만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난 시골뜨기 소녀였다.
부모님께서는 과수원과 고추 농사, 깨 농사, 양봉 등을 하시며 나와 동생을 기르셨다. 날이 밝으면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 우리를 두시고서 밭으로 달려가셨고, 나와 동생은 옆집 아주머니 손에 길러졌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농사일에 매달리셨다. 특히 여름에는 더 심했다. 서로의 모습을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내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을 때 밭으로 나가셨고, 늦은 밤 내가 잠이 들고서야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도시 아이들이 놀이터나 어린이 집에서 놀 때에 나는 나의 놀이터인 과수원에서 놀았고, 그들이 레고나 블록 등의 좋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에 나의 장난감은 과수원에 세워져 있는 트럭과 외발 수레였다.
13년간 농사짓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느낀 게 많다. 그 중에서도 두 가지를 말해보라면 하나는 농사 기술이 발전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년 내내 고생하시고 가을이 되어 그 고생의 결실을 거두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쌀 한 톨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여덟, 아홉살 밖에 되지 않았을 때의 기억으로는 그 때에는 사과 나무에 물을 줄 때에 경운기에 양수기를 연결해 못에서 물을 퍼올려 아버지께서 직접 그 큰 과수원을 돌아다니시면서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 물을 주셨다. 물 주려고 할 때, 때에 맞춰 비라도 오면 다행이었지만 가물 때에는 땀을 비 오듯이 흘리시며, 이만 저만 힘든 일이 아니었다. 약을 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께서는 무겁고 긴 줄을 어깨에 짊어지신 채로 약을 치셨고,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힘듦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시기 위해서 줄을 나눠 드시고서 아버지의 고통을 함께 했다. 매번 사과 나무에 물을 주거나 약을 칠 때 힘든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도 도와 드릴려고 했다가 너무 힘이 들어서 몇 번 하지 못하고 포기했던 걸로 기억된다.
또 다른 한가지 예를 더 들자면 깨를 심을 때, 비닐을 뚫고 깨를 심어야 했는데, 아버지께서 앞서 막대로 구멍을 뚫어 놓으시면 그 구멍에 맞추어 깨를 심어야 했다. 이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허리를 구부리고 일을 해야 했고, 구멍 뚫는 게 사람이 한 일인지라 간격도 일정하지 않아서 간격이 좁으면 나중에 깨가 자라는데 서로가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몇 년 후 우리집에서는 에스에스기(SS기, 정확히는 잘 모르겠음)를 샀고, 깨 심는 기계 또한 장만했다. 또 몇 년 후에는 스프링 쿨러도 설치했다.
새로 장만한 기계를 통해 기계의 혜택을 보면서 좀더 편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힘들게 줄을 어깨에 매지 않으시고서도 약을 치고 물을 줄 수 있었고, 어머니께서는 아버지를 도와야 할 시간에 대신 깨를 심을 수 있었다. 깨 심는 기계는 기계가 비닐을 뚫고 적당량의 깨를 넣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간격도 일정하고, 무엇보다도 서서 일을 할 수 있는 점이 일의 능률을 더 올릴 수 있었다. 또 시간이 단축되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시간도 늘어났고, 다른 일을 더 할 수도 있었다.
두 가지의 예 밖에 들지 않았지만,이건 농업의 발달을 확연히 나타내 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모네가 그랬고, 큰아버지네가 그랬고, 우리집이 그랬듯이 많은 사람이 이촌향도 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반면에 농촌이 좋아, 이촌향도를 역행해 도시에서 농촌으로 가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좀 전에 TV를 보는데 “대추 나무 사랑걸렸네” 라는 프로그램에서 할아버지께서 벼 한포기 한포기가 중요하다고 하셨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몸엔 우리 문화가 최고다. 요즘은 서양건 무조건 좋다는 생각이 너무 판을 치고 있는 것 같다. 오죽했으면 ‘신토불이’란 노래를 부르며 “우리 몸엔 우리 껀데 남의 것을 왜 찾느냐 고추장에 된장, 김치에 깍두기 잊지마라 잊지마 너와 나는 한국인 신토불이”라고 외치겠는가?
앞으로도 농업 기계가 지속적인 발전이 계속된다면, 또 우리 나라 국민들이 조금만 더 우리 농산물에 관심을 가지고 아껴주고,살 한 톨이라도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실천한다면,새롭게 우리에게 맞는 품종을 개발하며 나간다면 지금처럼 우리가 먹을 곡식을 외국에서 수입하는 일은 없어질 것이라고 본다.
크게는 우리 나라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 작게는 나의 소중한 추억들이 담긴 농촌의 발전을 위해서도 농업은 발전해야 하며, 반드시 농업의 미래는 밝을 것이라 생각한다.
p.s너무 부족한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행복한 삶되시구요, 사에취 팟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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