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옛날의 추억
내가 초등학교때만 해도 애향단장 이라는 각 마을 조장의 지휘아래 주말의 학교 생활을 마감 하곤 했었다. 지금은 그 말 조차 어색하고, 왠지 내 마음속 어딘가에 가슴 깊은 추억으로만 파묻혀 버린것 같은 느낌이다. 매주 토요일만 되면 각 마을 마다 운동장에 모여 줄을 서서 집에갈 준비를 했었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끝나면 동네까지 한명의 이탈자도 없이 개미 떼 처럼 한 줄로 쭉 서서 집으로 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일요일엔 시간을 정해 동네에서 만나기로 하고, 모종 청소할 준비, 동네 쓰레기 주울 준비등 마을 가꾸기 준비를 했다. 걸레, 호미, 빗자루, 비닐봉지 등 청소에 필요한 모든것들은 모조리 챙겨왔다. 다 모이면 첫번째로 할아버지들께서 주로 계시는 모종에 간다. 가서 바닥을 쓸고, 옆에 있는 양수장에 가서 걸레도 빨아와서 닦고, 고사리 같은 어린손과 호미를 이용해서 풀도 뽑고... 또 어른들 점심때나 술 드실때 안주 하시라고 집에 있는 고추모도 가져다가 심어서 텃밭도 가꾸었다. 그리고 돌을 쌓아 옆에 조그만 정원도 만들어서 물도 주고 했다. 그리고 나서 할머니들께서 자주 수다를 떠시는 방죽에 가서 청소를 했다. 여자들이 자주 있는 곳이라 그런지 왠지더 정겨운 곳이었다. 겨울엔 바위돌 처럼 꽁꽁언 방죽 속으로 들어가 썰매를 타고, 눈이오면 비료 푸대를 질질 끄셔가며 언덕에 올라가 미끄럼을 타고... 엉덩방아를 찧어서 아픔에도 불구 하고 끊임없이 즐거움을 느껴가며 썰매를 타던 내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여름엔 모종에 모기장을 쳐 놓고 밤새 오빠들과 동생들, 언니들과 수다를 떨며 오빠들이 밭에가서 당당하게 얻어온 수박 여러덩이를 먹으며 즐거워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정월 대보름 이면 동네 애들 끼리 모여 폭죽도 터뜨리고, 숨바꼭질도 했다. 그리고 더 웃긴것은 동네 한 가운데서 손을 잡고 빙빙 돌며 강강술래를 한 것이다. 가을엔 모종에 심어져 있는 은행나무 밑에서 은행잎으로 꽃을 만들고 가을의 낭만을 느껴보기 위해 나무를 흔들어 잎을 떨어 뜨리려다 동네 아저씨께 걸려서 혼나기도 했었다. 그리고 부모님께서 다 일하러 나가시면 짐승들 밥주는건 어린 우리 차지였다. 그러고 보면 짐승들과 얽힌 재미난 사연들도 참 많았던것 같다. 어렸을때 소 뒤에 가서 놀다가 소 뒷발에 차였던일, 염소 새끼가 놀다가 푸세식 화장실에 빠져서 죽을 뻔 한걸 살려준일, 동생이 짚다발에 불이 붙나 안 붙나 실험해 본다고 짚이 많이 쌓인 곳에 불을 붙여 불이났던일, 그래서 그 옆에 있던 소들이 꼼짝없이 불에 타서 화상을 입어서 엄마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며 소를 파셨는데 아직도 그 모습이 내 머리속에서 잊혀 지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행복하고 즐거웠던 일들... 지금은 몸소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어렸을땐 우리 마을을 우리 손으로 가꾸는 것은 필수의무로 여기고 마을 학생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그런 것이 었기 때문에 주인 정신을 가지고 마을을 가꾸었다. 지금은 농촌에 학생도 없는 반면 애들이 세계화와 디지털 세계로 인해 농촌활동이나 자연사랑에 힘쓰지 못하는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도 많이 변하고 있는 우리의 농촌, 어쩌면 이 농촌의 정겨움은 머지 않아 사라져 버릴지, 아무도 예측 할수도 알수도 없다. 그러나 많이 늦지 않은 지금, 도시의 아이들에게 부모로써 해야할 또 하나의 시급한 과제는 컴퓨터로 인해 정신적으로 쇠퇴해진 아이들을 농촌의 자연 세계로 안내해 주는 안내자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 한것 같다. 그래서 농촌의 소중함과 농촌에 대한 애향심을 갖아야 하는 이유를 마음에 새겨 주는 일을 나서서 해야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곳은 나 자신의 고향이자 우리 모든 인간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이런 과제가 남아 있기에 오늘날 우리의 농촌이 당당히 설 자리가 남아 있는것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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