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농촌에서 자란 아이..
나는 흔히들 시골이라고 부르는 농촌에서 살고있다. 아니 솔직히 이곳을 떠나서 살아본 적이 없다. 그런만큼 나에겐 특별히 농촌을 체험한다는 말이 어색하다. 농촌은 나에게 있어서 생활이기 때문이다.
어릴때의 나는 내또래의 아이들과 놀기를 좋아했다. 밥먹는것도 잊을만큼 좋아했을 정도였다. 그때의 우리에게도 골목대장 같은것이 있었는데,나와 친구들은 그를 따르며 여기 저기로 놀러 다니는것도 좋아했다.
여름이면 냇가에서 남자아이 여자아이 할것없이 윗옷을 벗어 제쳐두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았으며 여름이 끝나가고 가을이 될쯤이면 추수를 하는 어른들 옆에서 메뚜기 잡는것도 잠자리 잡는것도 재밌었지만, 우리는 그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목적은 동산이 아닌 그 가운데 두 팔을 벌리고 꿋꿋이 서 있던 밤나무였다. 우리는 돌을 던져서 밤송이를 따기도 했고, 운이 좋은 날은 마음씨 좋으신 아저씨께서 나뭇가지를 흔들어 주셨고 주머니 한가득 밤이 담겨지기 마련이었다. 그런날은 으레 밤 늦게 까지 돌아 가지 않고 있다가 엄마손에 억지로 끌려 들어갈수 밖에 없었다.
그건 밤이 없는 겨울에도 마찬가지 였다. 지금의 겨울은 그때에 비하면 정말이지 겨울이 아니다. 10년전의 겨울엔 내 키가 작아서였지는 몰라도 눈이 내리면 무릎선을 넘어 허벅지 까지 눈이 내리곤 했는데, 그런날은 이상하게도 엄마가 깨우지 않아도 눈이 뜨이곤 했다. 밥도 먹는둥 마는둥 대충 넘겨버리고 나는 꼬마 눈사람을 만들어 집 앞마당에 세워두고 우리 식구가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소원아닌 소원을 비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다음으로 비료푸대에 짚을 넣고 끈을 매서 동생과 함께 언덕으로 가보면 약속이나 한것처럼 대장과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참을 신나게 타다가 지루해 지면 우리의 활동무대는 언덕에서 얼음판으로 옮겨졌다. 그때 나와 내동생은 동네 아이들중에서도 유일하게 아빠가 만들어 주신 썰매를 가지고 있었는데 요즘은 티비에서나 볼수 있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 썰매는 나 뿐만 아니라 동네 아이들 모두 좋아했고 그때문인지 얼음판에서 놀땐 대장보다 우리 남매의 말을 더 잘 따르곤 했다.
2월쯤이 되면 우리가 기다리던 연중행사가 있었는데 다름아닌 쥐불놀이 하는 것 이었다. 여기저기서 어렵게 깡통을 구해다가 아빠앞에 갖다드리면 아빠는 못과 망치로 밑바닥에 구멍을 내주시면서 이렇게 해야 공기가 통해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리고 양옆에 구멍을 내서 굵은 철사로 매달아 불조심 하시라며 건네 주셨다. 그리고 드디어 그 날이 되면 우리는 나뭇가지와 짚을 논 한가운데에 모아두고 밤이되기를 기다렸다. 밤이되면 논에 모여 깡통밑에 아까 낮에 모아둔 짚을 얇게 깔고 그위에 나뭇가지, 다시 짚을 뭉쳐넣고 불을 붙여 소리를 지르며 정신없이 돌렸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모두들 큰 웃음소리를 내며 뛰어 다니기도 하고,또 다시 돌리고 뛰었다. 그날 만큼은 불장난 하면 오줌싸개가 된다는 어른들의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다음날이 되면 나는 울상이 되어 버리곤 했는데, 이유는 개똥 때문이었다. 어두워서 보지도 못하고 신발 여기저기 개똥을 묻혀왔던 것이었다. 아마도 나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생각하면 귀엽게만 생각되는데, 그땐 개똥밟았다고 놀림 받는게 싫어 울상이 되던 모습들이 가끔 떠올라 미소를 짓게 만든다.
이처럼 지난 날 나의 유년시절의 추억을 가득 만들어 준 곳은 다름아닌 농촌이었다. 요즘은 우리 동네에서조차 밤따는 아이들이며 썰매타는 아이들, 쥐불놀이 하는 아이들도 찾아 볼 수 없지만, 그래도 농촌은 나와 내 친구들에게만은 살아온 곳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농촌은 결코 틀별한 곳이 아니다. 알고보면 가까이 있고 우리의 부모님, 또한 우리 자신의 마음의 고향도 농촌이 될수가 있다. 농촌에서 자란아이로서 바라는 것은.. 우리 마음의 고향같은 곳인 농촌을 더욱 더 관심어린 눈으로 사랑해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