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 위에서
꼭 뭐에 홀린 사람같이 제멋대로 발걸음질 한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둑길로 가고 있다. 어디선가 낯익은 소리가 들리더니 들 깊숙히 들어가면 갈수록 또렷해 진다. 오래전에 머릿속 깊숙히에 공책한권 다 찢어서 꼬깃꼿깃 쌓아두었던 보물상자 앞에서 멈춰섰다. 이 울음을 누가 울어 대는지 궁굼해 참을수가 없다. 보물상자를 겨우 꺼내어서 포장을 찢어버렸다. 열쇠가 마땅치 않아 상자도 마구 부숴버렸다. 순간 "아" 소리가 턱 튀어나왔다. 이제 생각난다.
나 어릴적에 그토록 봄을 기다리게 했던 그놈들........
겨울이 끝나기 무섭게 불쑥 튀어나오던 녀석들........
잠이 덜깼는지 뒤뚱뒤뚱 거리며 뛰지도 못하던,
내 고사리 손에도 쉽게 잡혀 주던 개구리들........
아버지가 논에 물을대고 나면 밤새도록 귀가 따가와 잠을 못잤다. 아침이 되기가 무섭게 온 동네 아이들은 우리집 마당에 모였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논에서 뒹굴다 보면 하루해가 금방 떨어졌다. 큰놈들을 큰 개구리 배를 갈라 다리만 뗘냈고, 작은놈들은 작은 개구리 다리에 실을 묶었다. 마치 전리품이라도 되는 양 실매다른 개구리를 허리춤에 하루종일 차고 다녔다. 매일 그렇게 몇십마리씩 죽어 나가도 밤이면 또 귀가 따가왔다. 덕분에 뱀이며, 백로며 온갓 놈들을 다 구경 할 수 있었다.
조금씩 날이 후덥지근 해진다. 그러면 덩달아 올챙이들도 알을 박차고 나온다. 녀석들 생김생김이 참 웃기다. 얼굴은 동그랗고 큰 것이, 몸뚱이는 얼굴 반도 못된다. 거기에 입은 어찌나 큰지 자세히 볼라치면 메기 사촌같다. 그 위로 볼펜점이 두 개 나있고, 배는 하얀 것이 창자까지 다 보인다. 그 놈들을 잡아서 짜부시키는 것도 재미가 쏠쏠했다. 가끔 미끄리 그물을 어깨에 메고 바가지며 양동이를 들고 둑으로 갔다. 빤쓰까지 벗어 재치고 풍덩풍덩 물고기가 되버린다. 저만치 아래에다 그물을 대놓고 저우서부터 물장구를 친다. 그렇게 몇분을 휘젖다가 그물을 들어보면 벼레별게 다 걸려든다.
비도 올만큼 오고 벼알이 실해지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바빴지만 나는 할 일이 별루 없었다. 새벽녘에 아버지를 따라서 논에 나가곤 했다. 아버지가 논일에 연염이 없으면 나는 논두
렁에 앉아 손이 시퍼레지도록 풀을 뜯고, 뭉게고, 코 끝에 대고 냄새도 맞았다. 그렇게 풀냄새에 취해서 한참을 놀다보면 저절로 배가 고팠다. 그럴땐 영락없이 저만치서 어머니 모습
이 또렸 해졌다. 머리에 고쿠리를 이고 논길을 걸어오시는 그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엉덩이가 축축하다. 온몸에 한기가 도는 것이 여간 매서운게 아니다. 그래도 마음만은 훈훈하다. 미미하게나마 제 모습을 지키고 섰는 들이 너무 대견하다. 하지만 아까부터 코 끝을 찌르는 물 비릿내와 양수기 돌아가는 소리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나 어릴적에는 맡을수도 들을수도 없던 것들이었다. 언젠가 물 비릿내가 더 고약해 지고 양수기 소리가 더 크게 들리면, 그땐 울곳도 헤엄칠곳도 없는 개구린 내 머릿속 보물상자 안으로 영영 숨어들지도 모른다. 그러면 먼 훗날 나는, 꼭 지금 나보다 10살쯤은 어린 내 자식들에게 겨울밤 울 할매가 들려주던 옛날 이야기 마냥 내 어린시절을 들려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