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4-H운동이란 긴 여행을 마칠때가 왔습니다.
처음으로 4-H를 알게 된것은 대학시절인 1958년이었습니다. 이 땅에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한 알의 밀알이 되자'고 밀알회를 시작하면서 주로 4-H클럽을 조직하는 농촌봉사활동을 하면서 부터였습니다.
1962년 제대후 밀알회장을 맡으면서 밀알회 4-H연구반을 전남대학4-H연구회로 재창립하면서 4-H와의 인연은 깊어졌습니다.
대학교수로 남으라는 권유도 마다하고 농촌으로 돌아가기 위해 1964년에 농촌지도직공무원이 되었습니다. 첫발령지 곡성군과 화순에서 4-H담당을 자원하였고, 첫 농협과제에서 전국 1등을 하게되어 두 학생을 농협대학의 장학생으로 입학시킬 수 있었던 것은 첫 보람이었습니다.그 후 나는 1967년 산림청이 발족으로 농촌지도소를 떠나게 되어 1년여만에 공무원을 사직하고 신문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시민이 주인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시민사회단체육성하자는 뜻에서 밀알회와 신용협동조합운동에 노력하게 되었습니다.신협운동은 미미하게 시작했지만 농협의 개혁을 압박하는 민주화운동의 실천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던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습니다. 5.18은 한국정치에서 민주화운동의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점차 민주화윤동이 활발해지면서 정계진출도 여러번 권유를 받았지만 거듭 사양하고 90년대부터는 날로 심각해지는 공해와 환경파괴를 보면서 환경운동연합을 조직 광주전남의 상임의장,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상임의장,1994년에는 전국반핵운동본부 상임의장을 맡아 환경운동에 몰두했었고 광주광역시중소기업종합지원센타와 광주광역시환경시설공단 이사장으로 공직활동에도 참여하며 1996년에 대통령표창(1996년 제1회 환경의 날), 2008년에 국민포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 80년대부터 광주시4-H후원회장을 맡아 가장먼저 사단법인을 만들었고 4-H본부로 개편하여 지금까지 20여년간 4-H활동을 지속하였습니다.
2002년 6월에는 광주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후 고향(담양)으로 돌아가 담양대나무축제위원장, 광주광역시담양군통합추진위원장을 맡아 주민운동을 일으켰고,광주에서는 광주NGO시민재단을 조직하여 '하여 시민의 힘'을 만들어 언제나 역동적 시민운동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저는 오랜동안 4-H운동에 몸 담아 있으면서 우리 운동이 너무 청소년이 떠난 농촌현장에만 매달려 있는것이 안타까웠고, 정부의 힘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자립의 의지가 약한 것도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행이 2007년 4-H지원육성법이 만들어지면서 영농청소년과 도시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뿌리를 내리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이제는 과거 새마을운동의 기초이고 민주화의 훈련장이 되었던 4-H운동이 새로운 사명을 가지고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의 경험을 필요로 하는 아직도 어려운 지구촌사람들에게 희망의 멧시지를 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죽지않는 노병으로 마지막까지 다하지 못한 사명을 마무리할 생각입니다.다만 세계적 금융대란으로 박살난 기금을 복구하기 위해 관리위원장으로 위촉받았지만 원상회복에 미치지 못한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한국4-H본부에 참여하는 지도자, 사랑하는 4-H회원들, 임원과 직원 여러분의 건강과 행운을 빕니다.
평생을 함께했던 4-H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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