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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그 아름다운 삶
재물(財物)이 모이면 사람이 흩어지고 재물이 흩어지면 사람이 모인다
이 말은 재물과 사람의 관계에 관한 우리들의 오랜 금언이었습니다.
재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지 않으면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고
반대로 여러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재물을 베풀면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이 우리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금언은 재물보다는 사람을 더 귀중하게 생각해 온 우리의 문화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이제 참으로 옛말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재물이 모여야 사람이 모이고 재물이 흩어지면 사람도 흩어진다고 믿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사람보다 재물을 더 귀히 여기는 뒤바뀐 세태
재물과 사람의 관계가 이처럼 역전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물론 사람보다 재물을 더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재물을 사람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질문입니다.
재물만 있으면 사람은 얼마든지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어리석기 짝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물음이 현명한 답변을 주기도 합니다.
어리석은 질문은 때때로 우리의 삶에 대한 성찰과 사회에 대한 반성을 담기도 합니다.
뒤바뀐 금언을 놓고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먼저 ‘재물’에 관한 것입니다.
과거의 재물과 현재의 재물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과거의 재물은 이를테면 곡식과 같은 소비재 형태의 재물이었음에 비하여 오늘의 재물은 자본입니다.
재물과 자본의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재물은 소비의 대상이지만 자본은 그 자체가 가치증식의 수단입니다.
자본은 자기를 불리기 위한 것입니다. 결코 나눌 수 없는 성질을 갖는 것입니다.
재물은 사람의 사용을 위한 것이지만 자본은 자본 그 자체의 가치증식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결정적 차이는 재물은 무한히 쌓아 둘 수 없지만 자본은 무한히 쌓아 둘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재물인 자본은 이처럼 과거의 재물과 그 성격에 있어서도 판이하고 그 형태도 뚜렷하게 달라졌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불려나가야 하는 본질을 갖고 있으면서
단 한 개의 계좌만으로서도 무한히 쌓아놓을 수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재물인 자본의 실체입니다.
그러나 재물과 자본의 가장 큰 차이는 재물이 사용가치임에 반하여 자본은 교환가치라는 사실입니다.
재물은 결국 사람을 위하여 쓰임으로써 자기의 소임을 다하게 되는데 반하여
자본은 사람을 위하여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 교환하여
자기를 끊임없이 불려가는 과정을 반복하고 순환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재물이 모이면 사람이 모인다’는 오늘날의 뒤바뀐 금언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재물이 모이면 사람이 모인다는 오늘날의 금언은 곧 자본이 고용을 창출한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자본에 의하여 고용된 취업’이 오늘날 사람이 모이는 가장 보편적인 형식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자본을 중심으로 하여 모인 사람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본을 중심으로 모인 것이 과연 진정한 인격으로서의 만남인가.
자본은 결코 인격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창의력이 있는 사람을 요구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경우든 결국 자본은 가치증식에 필요한 노동력을 필요로 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물이 모이면 사람이 모인다는 오늘날의 금언은 결국 허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의 재물은 진정한 인격으로서의 사람을 모으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인간적 가치실현이 좌절된 직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갈등에서부터 노동해방의 치열한 투쟁에 이르기까지
우리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짐지고 있는 고통과 아픔이 바로 여기서 연유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재물이 흩어져야 사람이 모인다는 옛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금언으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재물을 흩어서 사람을 모으는 일은 단지 재물의 분배에 국한된 작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삶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나눔이 실천될 수 없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나눔을 주장하는 것은
동정(同情)이나 자선(慈善)과 같은 작은 담론과는 구별됩니다.
그것은 자본의 성격을 재물로 바꾸고 그 재물을 다시 사람의 소용에 닿게 하고자 하는
사회운동과 인간운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눔’의 담론을 분식(粉飾)의 방조적 공간으로부터 인간적인 사회건설의 실천적 현장으로 이끌어내는 일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실천적 과제인지도 모릅니다.
자본의 논리와 시장의 논리가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모든 인간적 가치를 황폐화시키고 있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나눔’은 사회와 인간을 읽을 수 있는 가장 민감한 코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나누지 못하는 사회를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역경을 겪어 온 김밥 할머니만이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삭막한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일수록 우리는 더욱 우직하고 어리석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뜨거운 기쁨은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돈이란 무엇인가? 하는 어리석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가장 뜨거운 기쁨은 사람으로부터 얻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가장 침통한 아픔도 바로 사람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것을 돌이켜 볼 수 없는 숨가쁜 골목을 달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생각하면 우리가 나누어야 할 것은 재물이 아닙니다.
자본이든 재물이든 그것은 근본적으로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미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형성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인간적인 사랑과 봉사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은 나눔으로써 반으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나눔으로써 두 배로 커지는 것에 국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눔은 사랑이어야 하고 모임은 봉사이어야 합니다.
사랑과 봉사, 그것은 조금도 상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과 봉사야말로 한없이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의 재물을 더 풍성하게 하고 우리를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사회를 그 구조에서부터 가꾸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영복님의 글에서........>
산다는 것....
노을이 새빨갛게 타는 내 방의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운 일이 있다.
너무나 아름다와서였다.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갑자기 울었고
그것은 아늑하고 따스한 기분이었다.
또 밤을 새고 공부하고 난 다음날 새벽에 느꼈던
생생한 환희와 야성적인 즐거움도 잊을 수 없다.
나는 다시 그것을 소유하고 싶다.
완전한 환희나 절망, 그 무엇이든지....
격정적으로 사는 것,
지치도록 일하고, 노력하고, 열기 있게 생활하고,
많이 사랑하고 아무튼 뜨겁게 사는 것,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도 끔찍한 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더 나는 생을 사랑한다. 집착한다.
<전혜림님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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