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5-15 격주간 제757호>
[지도자 탐방] ‘아름다운 고집’에 걸어보는 우리 농업의 희망
황 민 영 위원장 (국민공감 농정위원회)

황민영‘국민공감 농정위원회’공동위원장은 제5대 대학4-H연구회연합회장 출신으로 평생 농업·농촌·농민과 함께해 왔다.
굳이 농업인이 아니어도 농업에 조금이라도 관련된 사람이라면 모두가 ‘농업의 위기’를 말한다. 국민의 먹거리와 건강을 책임지는 생명산업이 위기에 처했는데, 이 위기를 벗어날 해법을 찾지 못해 답답해한다. 위기의 농업을 살릴 해법을 마련할 적임자로 ‘골수4-H인’ 황민영(70) 식생활교육국민네트워크 상임대표가 부름을 받았다. 그는 농업·농촌의 가치에 대한 국민적 이해를 높이고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출범한 농림축산식품부의 ‘국민공감 농정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아 6개 분과위원회를 이끌며 위기의 농업을 살릴 중점과제를 추진하게 된다.

위기의 농업을 살릴 적임자

지난 8일 서울 양재동 aT센터에 있는 식생활교육국민네트워크 사무실에서 만난 황 위원장은 “농특위 경험, 국민농업포럼, 식생활교육 등 나의 일이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장관의 국민 눈높이에 맞춘 농정과 부합해 이 직책을 맡게 됐다”고 말했다.
황 위원장은 고교시절부터 농촌·농민운동을 해왔으며, 대학 4-H연구회에 가입해 본격적으로 4-H활동에 뛰어들었다. 대학4-H연구회연합회 부회장을 거쳐 1966년 제5대 회장을 역임했다. 당시 활동에 대해 그는 “정말 쎄게 했다”고 말한다. ‘한국4-H운동의 토착화’라는 말도 이때 처음 나왔다고 한다. 대학4-H마크도 이때 만들었고 박두진 작사, 김동진 작곡의 대학4-H노래도 이때 제정됐다. 그는 대학4-H출신들의 역할에 대해 “농과대학을 그냥 다닌 게 아니었다”고 말한다. 농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4-H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독일 뮨스터대학에서 수학한 그는 처음 2년6개월 일정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유신정권 말기여서 일찍 들어오지 못하고 3년8개월을 있었다. 1980년 4월 28일에 귀국하고 얼마 되지 않아 5·18이 일어나 잠시 운동을 접기도 했다.

“농촌을 지원하는 지식인일 뿐”

황 위원장은 1994년 전국농업기술자협회 부설 한국농산물유통연구소에서 발행하는 ‘농산물유통정보’ 발간을 맡게 된다. 이 잡지는 처음 4×6배판에서 타블로이드판을 거쳐 타블로이드배판(대판)으로, 또 주 2회 발간하는 신문으로 발전했다. 바로 지금의 ‘한국농어민신문’이다. 38세에 시작해 2002년 60세까지 22년간 농업인의 권익을 대변하고 정보를 제공해 왔다.
그러면서 한국협동조합연구소 이사장, 전국귀농운동본부 대표, 국민의정부 협동조합 개혁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참여정부 대통령직속 농어업특위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때 농업·농촌·식품기본법을 제정해 농림수산식품부의 기초를 놓았다.
황 위원장은 그 후에도 국민농업포럼 상임대표로 활동한데 이어 현재 통일농수산 및 통일농수산사업단 공동대표, 농산어촌홍보개발원 이사장, 식생활교육국민네트워크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이처럼 한평생 농업에 몸 바쳐 일해 왔지만 그는 ‘운동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농촌에 살지 않아 농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농촌운동을 지원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지금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식생활교육네트워크는 4-H활동과 밀접하다. 특히 우리 농산물의 미래 소비자이자 농업·농촌의 우호세력이 될 학교4-H활동과 함께한다면 시너지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가 된다.
황 위원장은 지난 해 고희를 맞으면서 ‘아름다운 고집, 황민영’을 펴냈다. “후배들의 성화에 못 이겨 회고록을 냈다”는 그는 그동안 쓴 글들을 모은 칼럼집과 나름대로의 농정에 대한 생각을 모은 책도 펴낼 계획을 갖 있다. 황 위원장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한 ‘아름다운 고집’을 엿볼 수 있었다. 그와 나눈 이야기를 지면 관계로 다 쓰지 못함을 아쉬워하면서 우리 농업의 새로운 희망을 그에게 걸어본다.
 〈조두현 부장 dhcho@4-h.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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