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근 규 (한국청소년운동연합 총재)
“오늘도 예상인원보다 훨씬 많이 오셨네요. 매일 150% 이상 참석하시고 있어요.”
매년 이 때쯤이면 농업기술센터에서는 관련 분야별로 농업인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한우, 축산업에서 마늘, 고추, 잡곡과 양채, 오미자, 블루베리, 아로니아(쵸고베리)에 이르기까지 작목반별로, 지역별로 전문인들을 초빙해서 농업인실용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관심과 참석률이 높아, 예년에 비해 예상참석인원을 훨씬 웃돌고 있다. 보조의자를 가져와 자리를 더 만들고, 점심식사를 급히 추가하고, “교재가 모자르다”며 연신 양해를 구하며, 담당공무원들은 연일 즐거운 비명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난해 한미FTA시대가 시작되면서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위기감이 농촌에 서서히 깔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더구나 한중FTA까지 체결될 것으로 예견되는 상황에서 농민들로서는 그 엄청난 변화와 시대적 흐름을 어떻게 파악하고, 대처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한 것이다.
물론 정부와 관련 기관에서도 FTA시대로 전환되어 가는 과정에서의 충격과 피해정도를 완화해보고자 하겠지만 과거의 예를 보면, 결국 농촌을 지키는 것은 농업인들의 결단과 치열한 노력뿐이다.
돌이켜보면 1945년 해방과 연이은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우리나라에서 농촌사회의 고통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빈곤’과 ‘문맹’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처참하기까지 한 살림살이였다.
소를 가지고 있는 농가에서는 다소 나았지만, 대부분 농민들은 몸이 부서져라 온몸으로 농사를 짓고 있었고, 교육이니 문화, 환경이니 하는 것은 아예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당시의 ‘농촌생활’은 좌절과 절망의 늪처럼 우리 가슴속에 남아 있으며, 그 처절한 실상에 가슴 저미던 시절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이러한 암흑과 같은 농촌사회에 한줄기 빛처럼 4-H운동이 찾아왔다.
문맹퇴치와 빈곤극복을 위해 온 몸을 던지는 젊은 농민들의 농촌지킴이 운동이 마른 들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청소년운동으로 계몽과 봉사, 지원활동을 펼치며 농촌사회에 새로운 희망을 주는 가열찬 투쟁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었다.
1947년에 한국에 도입된 4-H운동은 65년간에 걸쳐 지(智 Head), 덕(德 Heart), 노(勞 Hands), 체(體 Health)를 생활이념으로 삼은 지역사회운동이었으며, 바로 우리 농촌에 새로운 희망과 꿈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농업을 지켜가고 있는 농민지도자, 국가정책을 이끌어가는 농업전문인 대부분이 4-H출신이다. 특히 농어민후계자로서 전국 연합회 결성을 주도하여 농어민후계자연합회를 창립해 오늘의 농업경영인중앙회를 탄생시킨 이도 알고 보니 4-H중앙연합회장 출신이었다.
이들이 4-H운동을 통해 농촌의 현실을 뼛속 깊이 자각하고 어두운 농업인의 현실을 극복해 내고자 몸부림치며 도전하고, 농민들을 절망의 수렁에서 새로운 시대로 이끌어 낸 4-H 지도자들의 공로는 말로는 다 할 수 없다.
가히 4-H가 한국농촌의 버팀목 역할을 감당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오늘의 FTA 자유무역주의시대를 두려움 속에서 맞이하는 농촌은 또 다시 새로이 청소년운동을 기다리고 있다.
지식정보화시대의 무한 국제경쟁사회를 살면서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농촌에 4-H운동이 다시 한 번 불을 지펴야 할 때가 되었다.
어느새 우리 한국농촌의 현실은 FTA시대를 맞는‘4-H’에게 새로운 시대적 도전과제를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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