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01 월간 제743호>
[지도자 수기] 4-H부부의 네잎클로버 향기
곽 인 식 지도자 〈경기도 광주시4-H연합회 초대회장〉

귀촌한지도 꼭 10년이 되어 간다.
1950년대 4-H회에 가입하면서 너무나도 큰 변화를 맞았다.
여러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려면 얼굴은 홍당무가 되고 다리는 마구 떨리며 말은 나오지도 않고…상상만 해도 오싹하다.
이런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마을4-H회에 가입하면서 처음‘보도원’이라는 직책을 맡았고, 다음해에 마을4-H회장이 되었다. 또 그 해에 면4-H연합회장과 군4-H연합회장에 잇따라 당선이 되었다.
1959년에는 동부면4-H연합회(현 하남시) 여부회장을 맡고 있던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는 교통수단이나 전화 같은 것은 대중화 되지 못하여 편지가 유일한 만남의 광장이었다.
서로 서신이 오고 가며 100여 통이 되어서야 군경진대회 때 처음 만나 프로포즈를 통해 열렬한 사랑을 하면서, 각자 소설 ‘흙’에 등장하는‘허숭’과 상록수의‘채용신’이 되어 흙의 문화를 개척하고자 1960년 11월 11일 11시에 4-H동지들의 축하 속에 백년가약을 맺었다.
11월 11일 11시는 한자로‘十’자와‘一’자를 합치면‘土(흙 토)’자가 되는데, 우연하게도 그로부터 25년 후 농업인의 날로 제정된 것이다. 그날이 우리 부부의 영광스런 결혼기념일이다.
귀촌한 마을은 내가 출생한 마을에서 5km 정도 떨어진 마을이다.
50여 세대가 옹기종기 모여 문화주택을 지어 공기가 좋고 물이 깨끗하여 산새들이 지저귀는 두메산골이다.
원주민은 3세대이고 나머지는 모두 외지에서 귀촌한 사람들이다.
2008년 우리 마을(구룡동)이 리(里)에서 분리되어 영동2리로 승격되었다.
이장의 임기는 3년인데 주민들이 초대이장을 연임시키려 하니 1년만 더하고 그만 두겠다는 고집불통을 보여 금년 1월에 마을 총회에서 72세의 할머니인 안식구가 이장으로 추대되었다.
우리나라 농촌에는 약 3만 6천여 개의 리(里)가 있다. 한 마을에는 한사람 이상 유능한 지도자가 절대로 필요하다. 거기에 이장은 중심이 된다.
나는 자칭‘이장 비서실장’이라고 하면서 열심히 외조를 하고 있다.
4-H부부로서 칠순을 넘겼지만 지난날 4-H운동을 통해 흙의 문화를 개척하자는 정신은 변함이 없다.
50년대 국민소득이 50불 미만이었지만 그 때는 이웃사촌 간의 정이 넘쳐 흘렀다. 수제비나 감자, 고구마를 쪄서 울타리 너머로 건네주는 그 따뜻한 정은 2만5000불 시대의 지금, 500배나 더 잘 살면서도 그 훈훈한 정은 사라져 갔다.
우리 4-H부부는 70대가 지나서도‘이웃 간에 이웃사촌으로서 정을 나누고, 이상향(유토피아)을 건설하자’는 청소년 시절의 그 정신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어린 시절 4-H회를 통해 익힌 회의진행은 이제 전문가가 다 되었다.
마을 총회에 참석하면 대부분 목소리 큰 사람이 좌지우지한다. 규칙도 모르고 원칙도 없다.
하지만 안식구가 첫 총회의 사회를 보며 회의진행을 일사천리로 말끔하게 처리하니‘여성 이장?’하고 의아해 하던 분들이 깜짝 놀라는 것이다.
최근엔 주민들의 오랜 숙원사업인 마을회관을 건축하기로 결정했다. 지금은 토목공사가 끝나고 곧 준공하게 된다.
마을회관이 준공되면 예전의 마을문고와 같은 작은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금년이 독서의 해라는 것을 온 주민들이 느끼게 하고 싶다.
청년4-H회원 시절, 낮엔 열심히 일하느라 심신이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밤에는‘수불석권’하지 않았던 그 때의 정신을 떠올리며 남은 여생, 제2의 4-H운동을 펼쳐 보고자 한다.
평생 네잎클로버 향기를 몸에 지니고 살아온 70대의 4-H부부는 오늘도 흙의 문화를 건설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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