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태 순 (소설가)
21세기로 들어서서 10년을 훌쩍 넘기어 11년째 맞이하는 신년.
지금은 이미 ‘21세기의 주민’으로 착실하게 살아 나가고 있다는 실감을 갖게 되지만 2001년 때에는 ‘밀레니엄’이라 하여 ‘20세기의 주민’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퍽 들떠 있었던 기억이 난다.
한반도의 20세기와 21세기는 엄청 다른 역사 연대기가 되는 것임은 분명하다. 전자의 세기는 전근대화의 단계에서 근대화운동을 벌여야 하는 명제 하나만으로도 너무 힘들어 하였는데, 후자의 세기로 들어와서는 ‘탈근대’ 내지 ‘탈산업-지식정보문명’ 담론을 펼치고 있다.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외국인들의 평가에서도 한국인은 ‘20세기 근대운동’ 학습 연마에서 ‘우수 졸업생’이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꼭 1백년 전이 되는 1911년의 ‘코리아’ 상황은 어떠하였던가. ‘일본-한국 병탄’이라는 치욕을 한 해 전에 겪게 하였던 식민압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해에 독일 신부 한 명이 코리아를 찾아와서 4개월가량 머물며 그 문화와 삶을 글과 사진으로 생생하게 기록했는데 1970년대 말에 남부 독일 뮌헨 부근의 어떤 수도원에서 지하실 공사를 하다가 1만5000m 분량의 35mm 필름이 극적으로 발견되었다. 독일인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의 영상기록은 한국의 농업과 수공업, 풍습, 명절, 예식 등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그 제목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라 하였다.
1백년 전의 한국인, 과연 어떻게 살고 있었던 것인지 2010년 2월 KBS가 ‘역사스페셜’을 통해 이 영상기록을 편집하여 방송했는데 백년 후의 한국 시청자들의 반응은 또한 과연 어떠하였던가.
공감하거나 동감하기 보다는 이상하고 불쾌하다는 쪽이 우세하였다고 한다. 19세기 후반부터 조선왕국을 찾은 서양 선교사들은 ‘아침이 맑은 땅’, ‘아침이 밝은 땅’이라는 의미를 담아내는 동방의 나라가 기이함,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음을 목도하면서 동시에 반문명 상태에 놓인 폐쇄적인 약소국의 실상을 살폈다.
‘21세기 세계 주민’인 오늘의 한국인들이 19세기의 ‘은둔의 나라’, 1백년 전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대해 동질감 보다는 이질감부터 느끼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겠다. 오늘의 한국은 전혀 은둔의 나라가 아니며 고요하기는 커녕 시끄럽고 복잡한 환경 속에서 초고속 스피드의 생활을 영위해야 하지 않는가.
단재 신채호선생은 ‘조선상고사’ 총편에서 항성(恒性)과 변성(變性)에 대해서 논구한 바 있다. ‘항성’이란 시대가 아무리 달라져도 변할 수 없는 항구여일의 문화콘텐츠이고 그리고 ‘변성’은 급변하는 시대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신해야만 하는 패러다임문화이다. 여기에서 그는 항성이란 제1의 자주성이요, 변성은 제2의 자주성이라 했다. 항성과 변성의 양극화 현상, 이에서 빚어지는 엄청난 갈등과 모순을 한국처럼 압축시간의 상황 속에서 맞부딪쳤던 경우는 참으로 드물다고 할 수 있다.
2011년의 한국사회에서 항성의 문화와 변성의 문화는 어떻게 화해되고 있는지, 조화를 찾아내고 있는지 묻는다. 이를 기층문화-표층문화의 상관관계로 살피는 인류학 탐구도 있다. 전자는 사회생활양식의 ‘항성’으로 지속되고 후자는 사회생산양식의 ‘변성’으로 유행을 바꾼다. 전자는 ‘숨은 일꾼’의 생산활동, 보람생활이 되며 후자는 ‘드러난 일꾼(명망가)’의 정치경제활동, 엘리트주의가 된다. 잘난 일꾼들의 ‘뽐내기 문화’보다는 숨은 일꾼들의 ‘못난이 문화’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떠받드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고요한 아침’이 ‘소란스러운 아침’보다 좋은 것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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