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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내조로 헌신한 민언기 여사(왼쪽)와 함께 다정한 포즈를 취했다.> |
성 석 환 부회장 (강원도4-H본부)
따스한 봄기운이 잠시 자취를 감춘 4월의 을씨년스런 날씨 속에 기자는 ‘봉사를 직업으로 가진 4-H인’을 찾아 원주로 향했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강원도4-H본부 성석환 부회장(65·강원도 원주시 일산동)이다. 기자를 만나자마자 성 부회장은 자신이 4-H에 투신하게 된 이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6.25때 부친께서 횡성 이목정지구전투에 참전하셨다가 전사하셨죠. 열 살도 안 된 제게는 정말 받아들이기 벅찬 크나 큰 충격이었습니다”라고 말문을 여는 성석환 부회장. 이러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극복하고자 고심한 끝에 4-H를 알게 됐다는 성 부회장은 12세 어린 나이인 1954년, 원주시 소초면 평장리에서 강원도에서는 두 번째로 이동단위 4-H회를 결성하게 됐다고 했다.
불우한 청소년 시절을 4-H와 함께 헤쳐 나간 성 부회장은 중학교 시절부터 본격적인 4-H운동에 나서 환경 개선, 식생활 개선 및 부업 장려 등 9개 4-H회를 조직하여‘잘 살기운동’에 선봉을 섰다.
“그 당시에는 4-H가 농촌의 엘리트집단으로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지식을 습득하는데 유일무이한 곳이었다”고 감회에 젖은 성 부회장은 “무엇보다 어려운 시절 동료 회원들과 불철주야 토론하며 활동했던 것들이 내 인생의 등불이 되어 주었다”고 강조한다.
청소년 시절 등불 되어 준 4-H
이와 같이 어린 시절 4-H활동을 통해 자신이 받은 혜택을 고스란히 보답하는 길은 4-H활동을 더욱 정열적으로 전개하여 농촌의 후배들을 올곧은 인재로 자라게끔 하는 것이라는 성석환 부회장.
원주군 평장리 4-H회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소초면연합회장, 원주군연합회장, 강원도4-H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차근차근 리더십을 쌓아 간 그는 농촌금고와 원주지구자각회 등 여러 농촌운동단체를 만들어 농촌근대화운동에 앞장서 왔다.
이미 60~70년대 새마을운동의 기수로서 전국에 명성을 떨쳤으며 70년대 초 전국 최연소 농업협동조합장과 원주시 양잠협동조합 초대조합장, 원주시새마을금고 연합회 초대회장으로 농민과 서민운동에 앞장서서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을 받고 인간상록수로 명명되어‘향토를 빛낸 영광의 얼굴’기록보존자로 강원도에 의해 선정되기도 했다는 그는 그동안 각계로부터 받은 표창장이 159점에 이른다. 2003년부터 도본부 부회장직을 5년째 맡고 있는 그의 봉사정신은 특히 남다르다.
1986년 이후 21년간을 단 한 차례도 봉급을 받는 자리에 취임한 적이 없이 오직 자원봉사만을 고집해 왔다. 현재도 단벌 양복에 옷이 헤질 때까지 입으며 자신에게는 혹독할 정도의 검소한 생활을 한다.
또한 동해안 산불이 발생하자 모금운동을 펼쳐 2443만원을 전달했고, 강원북부지방 수해 때는 1497만원을 현지를 직접 방문, 전달하고 위로했으며 북한에 산림 묘목 10만 그루와 우유 보내기 등 불우 이웃을 보면 돕지 않고는 못 견디는 천상 봉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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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부회장은 원주군농촌계몽단장으로 각 학교에 초청받아 강연을 했다(1962년 5월 4일).> |
<인간상록수 뱃지를 문공부장관으로부터 수여받은 성 부회장(1970년 5월 6일)> |
4-H 통해 인간성 회복운동 전개
한편 현재 4-H 및 후배들에 대한 조언을 빠뜨리지 않는 성석환 부회장은 “과거에는 4-H회원들이 모두 농촌의 엘리트로서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이 막대했으나 환갑을 지난 지금에선 아쉬운 점이 많다“며 4-H회가 엘리트 집단의 인재들이 자발적으로 모일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란다.
무엇보다 “현역 학생 및 영농회원들의 선배들에 대한 예의범절이 미흡한 점이 가장 안타깝다“고 말하는 그는 지·덕·노·체 4-H이념 중‘덕’을 바탕으로 한 인간성 회복운동이 절실하다고 일침을 놓는다.
마지막으로 부인 민언기 여사의 열성어린 내조가 없었다면 농촌계몽운동과 4-H에 대한 사랑을 꽃피울 수 없었을 것이라는 성석환 부회장의 말 속에서‘가화만사성’이라는 단어를 다시 한 번 되뇌이게 됐다.
〈정호주 기자·skyzoo74@4-h.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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